거북이처럼 썼는데, 쏜살같이 읽히는 ‘8월 종파사건’
역사학은 자료에 기반한 학문이다. 자료가 무척 중요하다. 북한사 연구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먼저 〈노동신문〉 같은 북한 공식 자료가 있다. 검열을 통한 자료이기 때문에 특정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의 가치가 있다. ‘1급 자료’는 아니다. 두 번째는 한국전쟁 때 미군이 북한 지역에서 노획한 회의록 등 문서들이다. 당시 미군은 노획 자료를 수집·관리하는 ‘자료 부대’를 운영했다. 이 노획 문서는 “연구자가 평생 다 읽지 못할 정도로” 분량이 방대하다. 이 자료는 한국전쟁 전까지 북한 내부의 실상을 보여준다. 그다음 시기는? 북한 주재 소련 대사의 일지 등 옛 소련 외무부가 생산한 문서로 ‘커버’가 가능하다. 이 자료를 통해 당시 북한 유력 인사들의 활동을 알 수 있다. 인물들의 알력까지 생생히 드러낸다.
북한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김재웅 박사(52·고려대·중앙대 강사)의 단행본 〈예고된 쿠데타, 8월 종파사건〉은 세 번째 자료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13년부터 4년에 걸쳐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번역해 〈북한관계사료집〉 시리즈를 발간한 바 있다. 김재웅 박사는 1956년 북한에서 있었던 ‘8월 종파사건’의 배경·전개 과정·사후 처리가 이 자료들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곳곳에서 이상조라는 인물이 언급되었다. 그는 약 20년 전 대학원 박사과정 시절에 반병률 당시 한국외대 교수에게 들은 수업 내용을 떠올렸다. ‘소련 주재 북한 대사를 지낸 이상조라는 인물이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가 발굴되었다. 북한 연구자라면 지도자의 과오를 용기 있게 비판한 그 편지를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8월 종파사건의 한가운데에 바로 그 편지가 있었다. 김 박사는 이상조를 주인공으로 삼아 책 집필에 나섰다.
반대 세력에 ‘종파’ 프레임 씌워···
1956년 8월3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북한 지도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이후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이 이어진다. ‘8월 종파사건’은 이때 일을 지칭한다. “공식 회의석상에서 김일성과 북한 지도부를 비판한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북한 지도부는 반대 세력을 ‘종파’라는 프레임을 씌워 축출했다. 이 사건은 경직된 유일 체제로 이어지는 근원이 되었다(북한 체제의 관점이 강한 명칭이라 김재웅 박사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이 이 사건을 ‘8월 전원회의 사건’ ‘8월 사건’으로 적기도 한다). 저자는 ‘소련계 한인’ 당 간부에 대한 탄압, 김일성 개인숭배, 당내 집단지도체제의 와해, 김일성의 활동에 편중한 항일 투쟁사 왜곡 등 복합적 원인이 이 사건에 얽혀 있다고 진단한다.
당시 북한 내부 상황뿐만 아니라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연설, 이 연설이 영향을 미친 폴란드·헝가리 사태, 중·소 분쟁 등 국제적 사건이 8월 종파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맹렬히 비판하며 신노선을 주창했다.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은 북한에 대해서도 ‘김일성 개인숭배’ 해소를 압박했지만, 북한 지도부는 ‘과거에 남한에서 박헌영 개인숭배가 만연했다’는 식으로 회피했다. 당시 소련 주재 북한 대사 이상조는 흐루쇼프의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 연설에 공감했다. 그는 북한의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는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서한을 북한으로 보내기 전에 양해를 구하기 위해 소련·중국 지도부에 미리 보여주었다. 두 나라는 공동대표단을 파견해 북한 지도부를 압박하기도 했지만 중·소 갈등이 격해지자 서로 북한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입장을 바꾸며 북한 지도부에 손을 내밀었다. 결국 북한으로의 소환을 거부한 이상조 대사는 소련으로 ‘정치적 망명’을 해야 했다. “이상조는 소련을 상대로 한 외교 활동을 통해 김일성을 비판했다. 소련 측에 많은 자료를 넘겨주었고, 이상조의 그 자료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책 작업을 하는 데 4년이 걸렸다. 자료를 모으고 읽는 데 2년을 바쳤다.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등 소련계 한인들의 증언록도 검토했다. 북한에서 종파로 몰렸던 여러 인사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증언록 자료를 많이 남겼다. “이들의 증언과 옛 소련 자료를 교차 검토했다. 그 결과 증언록이 당시 사회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객관적 자료라고 판단했다.” 그 과정에서 기존 연구의 몇 가지 오해를 짚어내기도 했다. “최창익·박창옥이 이 사건을 주도했다는 통념이 있는데, 자료에 따르면 서휘·윤공흠·고봉기·이필규·이상조 등 당시 40대 초반의 소장 인사들이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또 이들의 밀모를 김일성에게 알린 게 최용건으로 정설처럼 굳어져 있는데, 러시아 자료 등을 검토한 결과 박창옥의 포섭 시도에 넘어가지 않은 남일이 김일성에게 귀띔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2년은 골방에 틀어박혀 있다시피 하며 글을 쓰는 데 바쳤다. A4 용지를 반으로 접고 하루에 한두 장씩 글을 썼다. 손으로 쓴 그 초고를 보면 어떤 대목에 어떤 자료를 인용할지 적혀 있다. 수많은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고 배치할지 미리 궁리해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북이처럼 천천히 써 내려간 아날로그식 글쓰기. 왜 그랬을까. 김재웅 박사는 “북한사를 대중화하는 데 관심이 있다. 북한사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전문 영역으로 남아 있다. 통일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북한의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통일로 향하는 길이 비록 멀다 하더라도 북한사 대중화 작업이 통일로 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 덕분에 깊이 있으면서 소설처럼 쉽게 읽히는 북한 대중서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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