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8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올해로 55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최근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8월 독회 추천작은 듀나(Djuna)의 SF 단편집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단비)과 임수현 장편소설 ‘퇴역로봇’(문학수첩)입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
끊임없이 분기하는 해석의 열린 거울
듀나의 짧은 단편들이 주는 매력은 미니멀한 사건이 윙크하듯이 띄우는 미묘한 암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암시들은 정말 미묘(微妙)한데, 그것은 독자를 거듭해서 해석의 두 갈래 길 앞에 놓기 때문이다. 가령 이번 소설집,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단비)의 첫 작품, ‘가거라, 작은 책이여’는 유명한 문학작품들에 대한 독서경험을 제공하는 ‘책 읽어주는 아무개’류의 ‘사이파이Syfy’ 버전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소설로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정보취득으로 전락한 독서(경험)가 아니라, 그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과 그 가족들의 자살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직업상의 문제를 제거하고 읽으면 이는 자살 유전자를 가진 가족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긴 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이 작품의 가치를 알 수 없게 되고, 또한 이 사실 자체가 현실적으로 거의 가능성이 없다. 왜냐하면 자살 유전자를 가진 종은 종족 번식에서 도태될 확률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물들의 자살을 주인공의 직업과 연계시켜 생각할 수밖에 없을 터, 그렇게 읽으면 ‘독서 경험 제공’이라는 저 기발한 작업의 허위성에 대한 자각적 반응이라는 해석을 자연스럽게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미묘한 엇갈림이 발생한다. 독서경험의 원인에 관한 것이다. 방금 주 인물 ‘한서율’의 자기 행위의 허위성에 대한 자각적 반응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유전적 연계, 즉 동생과 아버지의 자살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이 가족이 모두 독서에 몰입하여 체감하는 성향이 두드러진 유전자를 가졌다는 가정하에, 세 인물의 자살에는 위대한 문학작품 내부에 도사린 치명적인 독성, 즉 삶의 허무함에 대한 비극적 감정을 자극하는 성분들의 압도적 함유량이 원인이 되었으리라는 추정과 함께, 문학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방향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게끔 독자를 부추기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마지막 대목, 즉 한서율의 아버지 한종인이 한서율의 선물, 즉 ‘딸의 경험을 체험’케 하기 위해 딸이 ‘특별히 작업’한 치명적인 선물을 받은 지 사흘 만에 ‘자신의 양쪽 눈을 칼로 도려내고 혀를 자른 뒤 목을 매 죽’는 결말은 ‘오이디푸스’에서 ‘안달루시아의 개’에 이르기까지 진실을 본 자는 눈이 멀 수밖에 없게 되는 비극적 운명과 더불어 진실과 외관 사이의 근본적인 어긋남이라는 궁지 앞에 독자를 세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갈림길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한서율이 독서경험을 제공하는 작품들의 목록은 이른바 정전화되어 “문제 될 것이 없는 ‘세계문학 전집’”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바로 정전화라는 사회적 행위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고, ‘세계문학 전집’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즉 일률적으로 추려진 위대한 문학의 표본들이 본래 문학에게 가정된 ‘고유성’과 충돌하면서, 또한 독자 개인들의 저마다의 성향에 대한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으니, 이는 궁극적으로 문학을 줄 세우는 사회적 인습 및 제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유도한다. 방금 전만 해도 문학 자체의 효과라고 보였던 것이 이제는 문학 제도에 대한 의혹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듯 듀나의 단편들은 최소 사건으로 최대의 해석 가능성을 품고자 하는 의지로 반짝거린다. 가외로 이런 의지가 ‘사이파이’적 형식을 띠고 있다는 것은 ‘사이파이’와 추리소설의 차이를 깨닫게 해준다. 추리 소설은 진실의 가능성이라는 평면을 탐사하는 반면, 사이파이는 해석의 가능성이라는 평면을 넓힌다는 것이 그것이다. 진실은 하나이지만, 해석의 면은 무한하다. 사이파이의 미래를, 더 나아가 우주의 미래를 평행우주로 진화하게 하는 건 아주 자연스런 수순이라는 걸 새삼 마음 자락에 한 줄 빗금을 긋게 한다.
♦퇴역로봇
DMZ의 생각하는 로댕, 아니 로봇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을 로봇에게서 만나는 건 기이한 느낌을 준다. 잘 알다시피 저 유명한 조각가의 ‘생각인’은 ‘지옥의 문’(단테) 앞에서 고뇌에 빠져 있다. 임수현의 ‘퇴역로봇’(문학수첩)이 전해주는 우리의 ‘생각봇’, ‘제로원’은 DMZ 안에 버려진 채 끊임없이 생각의 더듬이를 옮기는 일에 빠져 있다. 그는 본래 전투용으로 개발되었으나 전쟁이 기획상품이 되어버린 시대에 할 일을 잃고, 탐사로봇으로 살다가 마침내 퇴역당하고 만다.
우선 이 로봇이 가상적으로 AI의 미래를 그린다는 점을 가외로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고도의 계산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은 마침내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의식을 가지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품으면서 ‘오류를 통해서 성장’할 지적 생명으로 진화하리라는 것을. 하지만 이 작품에선 소설을 위한 편의적 장치일 뿐이다. 그에 기대어 작가는 ‘생각하는 로봇’을 등장시켰다.
이 기계가 어쩌다가 생각이라는 이상한 짓을 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도 전쟁무기로서의 자신의 존재 이유의 실종 앞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는 DMZ에 투입되었으나 실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떠맡은 군인들과 당번병이 건성으로 관리하는 쓸모없는 기계로 전락해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은 채로 그는 자신의 이동 공간을 탐사하는 일에 골몰하고 더 나아가 그런 상황을 만든 세상일에까지 생각을 뻗치게 된다.
만일 독자가 이런 로봇의 곤란한 처지를 통해서 한국의 분단상황과 보이지 않는 세계기구의 전쟁을 포함한 갈등관리에 대한 비판을 읽고자 한다면, 이런 설정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인간들의 사건들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포인트는 다른 데에 있다. 이 소설은 로봇의 기구한 운명을 한 갈래로 잡고, 화자의 ‘민통선 평화·통일 걷기’ 프로젝트와 동백림 사건으로 투옥되고 사회적 진로가 좌절된 화자 삼촌의 후일담으로 이루어진 인간 이야기를 다른 갈래로 잡아, 그 둘을 대위법적으로 교대시키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로봇의 대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인간들은 무언가 세계에 대한 기획을 한다. 좋은 삶을 만들기 위한. 그런 기획과 실천에는 신심이 배어들어 있다.
반면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은 DMZ 공간을 부단히 탐사하는 일뿐이며, 그는 화성의 탐사차들이 폐기될 때까지 근 행성에서 했던 일을 그대로 수행한다. 화성의 탐사차를 상기해보자. 소저너로 시작해, 스피릿, 오퍼튜니티, 큐리오시티가 차례로 이어졌고 지금은 퍼서비어런스가 일하고 있다. 우리의 ‘제로원’은 최초의 탐사차(체류자)에서 최근의 퍼서비어런스(인내)가 품은 의미를 그대로 제 생의 철학이자 일상으로 삼아서 일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로봇에 의한 고유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광범위하고도 촘촘한 리얼리즘, 즉 보이는 사물들 모든 것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묘사이다. 그는 DMZ 내의 풍광, 자연재해, 탈출소동, 밀렵꾼들, 연구원 등을 일일이 관찰하고 더 나아가 전쟁 무기의 진화, 평화 이데올로기로 꿈틀대는 사람들의 동작 등을 모두 기억 속에 담는다. 로봇 관찰의 특성은 꼼꼼하고 모든 디테일들에 공평하여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을 양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DMZ를 둘러싼 인간의 행동과 로봇의 행동은 명확한 대비를 이룬다. 인간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그것은 주관적 편향과 의미에 대한 환상 속에 숨겨진 허위의식(이데올로기)에 노출된다. 반면 로봇은 의미와 무관하게 완벽히 공평한 관찰을 한다. 로봇이기에 가능한 리얼리즘이다.
누군가 물을 것이다. 본래 리얼리즘이란 게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 소설가들의 사실주의가 바로 그런 객관적 관찰의 진수를 보여준 게 아닌가? 아니다. 인간이 내놓은 리얼리즘은 언제나 주관적 선택의 결과였다. 염상섭의 『삼대』를 생각해보라. 세 부자와 연관된 몇 사람의 인물들이 당대인의 전형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정말 그들만이 있었나? 가령 수전노에 가까운 부자 노인, 타락한 기독교인, 우유부단한 손자만이 있었나? 또한 엥겔스(F. Engels)가 격찬했던 발자크(Balzac)를 보시라. “왕당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승하는 부르주아에 대한 찬가를 노래했다”는 그의 ‘의도에 반한 리얼리즘’은 그렇게 해석되는 한 귀족/부르주아의 대립이라는 특수한 사회사적 구성의 빵 틀에 의해 찍혀 나온 ‘팜플렛’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런 해석적 편견을 버린다 하더라도, 발자크의 사회사에서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연소의 원리를 정확히 규명한 화학자 라브와지에(Lavoisier)는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발자크와 함께 수학했던 그는 오로지 발자크에게 과학적 영감을 줄 뿐이다. 또한 발자크가 경모했던 앙드레 셰니에(André Chénier)의 시는 그의 ‘환멸(Illusions perdues)’(흔히 ‘사라진 환상’으로 번역된다)에서 ‘뤼시엥’과 ‘다비드’로 분해되어 버린다. 거기에 객관적인 셰니에가 있는가?
인간 행위의 형식이 그런 것이다. 인간은 먼저 의도하고 계획하고 선택하고 구성하며 결과를 측정하고 다시 의도를 재구성하고 계획과 선택을 다시 짠다. 그러면서 판을 점점 넓힐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행위의 주관성을 부인할 수는 없으며 다만 그 점을 이해하고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들이 미래의 가정된 객관성에 근거한 다른 주관성들의 참조, 즉 간주관성의 성질을 강화함으로써 좀 더 진전된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반면 임수혁에 의해서 창안된 로봇은 아직 그런 계획을 도모할 정도의 지적 생명이 아니다. 현재의 수준에서 로봇은 우선 정보를 무차별하게 모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정보들의 무의미성에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게 로봇의 정신상태이다.
하지만 바로 ‘생각하는 로봇’의 고뇌가 여기에 와서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이게 뭐지?’라는 의문은 버려진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의혹 때문에 그 반사작용으로 생겨난 새로운 의식 현상인데, 그 의문 덕분에 그는 인간들의 이념적 의도 바깥에서 사물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물들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단 채로, 사물들 사이의 관련을 탐색하며 그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다. 거기에서 인간들이 평화 이데올로기에 갇혀서 둘러보지 못한 새로운 ‘풍경’이 태어난다. 아직은 그 의미를 온전히 획득하지 못하고 단지 곧 소멸된 운명에 대한 비애를 안고 무언가 의미를 이루고자 안간힘을 쓰는 정열들의 관계망, 그런 풍경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풍경(paysage)’이라는 단어가 처음 발명되던 르네상스기(알렝 레이, ‘프랑스어 문화사전’)에 실제 그 풍경이 태어나던 광경과 흡사하다. 인류학자 피에르 데스콜라(Pierre Descola)는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뢸란트 사베리(Roelandt Savery)의 경우를 들어 풍경의 객관적 성질이 이 시기에(좀 더 정확히는 그보다 1세기 전에 발효하여) 인지되었다고 풀이한다. 즉 프라하 궁정의 공식 ‘풍경화가’로서 알프스와 보헤미아의 주목할만한 명소들을 그려 궁정에 보고하는 임무를 띠었는데, 그 자연들을 실제로 묘사하는 과정 속에서, 그 당시 화풍의 이념적 원칙, 즉 궁정 세계의 신성한 의미를 표상하는 ‘내면의 창’과 격절되어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세속적인 바깥의 풍경”을 발견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피에르 데스콜라,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 Philippe Descola, Par-delà nature et culture , Paris: Gallimard, 2005, p. 115.)
르네상스기 ‘풍경’의 발견이 종교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신적 혁명의 한 코를 이루었다면, ‘퇴역로봇’의 ‘제로원’이 탐사한 ‘풍경’은 삶의 인간적 형식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새로운 장정의 단초로서 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하염없이 밋밋한 관찰들을 그런 시각하에서 다시 읽으면 그 밑바닥에 일렁이는 열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문득 한 노래가 흥얼거리고 싶어진다.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노고지리, ‘찻잔’)
구효서·소설가
♦퇴역로봇
임수현의 ‘퇴역로봇’은 독서경험을 새롭게 한다. 여느 장편소설을 대할 때처럼 느긋하게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눈을 비비고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기대했던 인물 사건 배경들이 여간해서는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나의 기대가 공연하거나 막연한, 혹은 나태한 습관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장편인데도 인물이 많이 등장하지 않으며 그마저도 화자에 의해 오롯이 장악되어 있다. 그러니 대화도 없다. 에피소드는 있을망정 사건이라 할 것도 별반 없다. 말 그대로 서술(차례로 말하거나 적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사변적 문장들이 기약 없이 이어진다. 그러니 이게 뭐지? 하고 눈 비비며 다시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소설이라는 글을 쓰고 있는데 소설 일반의 구성방식을 따르지 않는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글로써 인물과 사건을 만들어 소기의 지점으로 독자를 유도하거나 안내하는 극적 효과를 도모하지 않고, 그나마 작은 언덕처럼 소설의 구조가 생길라치면 어느새 비허구적인 문장들을 부지런히 진행시켜 기어이 평지화하고 만다. 아무래도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무언가를 중뿔나게 엮거나 묶어서 우리에게 불쑥 내미는, 글이라는 기능체에 대한 반감 혹은 의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가 짓는 이야기는 안으로 좁혀 단단히 뭉뚱그려지지 않고 바깥으로 종작없이 뻗어나가며, 따라서 의미나 내용 따위 아랑곳 않거나 그나마도 흩는다. 의미나 내용이라고 했지만 그것이 좀 더 글쓰기의 압력에 의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다져지면 관념도 되고 이념도 되며 도그마의 결을 갖추게도 된다.
작가가 소설 속 두 화자를 DMZ를 따라 걷게 한 것도 70년 분단의 시간 속에서 도그마화 된 우리의 슬프고도 가련한 언어들과 맞닥뜨리게 하려는 의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령 반공이든 통일이든 DMZ를 사이에 두고 딱딱하게 굳어 옹이진 한반도의 특수 언어들의 지근거리에서 휘휘 노를 젓듯 혹은 플라뇌르의 해찰처럼 언제까지고 글과 말을 방류하는 것. 그 딱딱함과 하염없음의 대비야말로 우리의 분단사를 새롭고도 효율적으로 반추해 내는 소설적 작업이 아닐까.
남북, 좌우, 해방, 자유 등 분단이 노정하고 응결시킨 수상하기 짝이 없는 가짜 진리에 하염없음과 해찰로 훼방하듯 대응하는 작가에게는 두 가지 전략이 있어 보인다. 안으로 좁혀 단단히 뭉뚱그리려는 글쓰기(혹은 발화행위)에 반하는 희석 전략으로서의 물량화 글쓰기가 그 하나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환유의 문장이 그것이며 때로는 심기증, 적환장, 펠릿, 가빠, 우샨카, 옥생각, 작화증, 홍예교 등 새롭거나 낯선 낱말을 쏟아 부어 글쓰기의 농도와 밀도를 낮추는가 하면 무수한 한자어를 지향사격처럼 무차별 투척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분단과 대결의 엄혹함이 실은 거대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서늘한 사실을 사소한 농담에 빗대어 말하는 이른바 농담 전략이다. 밀란 쿤데라가 ‘농담’에서 자살하려는 엘레나에게 독약이 아닌 설사약을 먹임으로써 역사적 농담을 개인적 농담에 빗댄 적이 있었는데, ‘퇴역로봇’에서도 남쪽으로 귀순하려는 북한병사가 비닐하우스 딸기 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똥을 누다가 잡혀서는 남쪽으로 귀순한다고 신호를 보냈건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치는 웃을 수 없는 코미디가 연출된다. 간첩 외삼촌 이야기는 어이없어 화가 나는 한국형 분단 코미디다.
이처럼 임수현은 단단하게 얽혀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이 땅의 분단과 분단사를, 의미 생성 원리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하염없는 문장과 초월적 농담으로 되비추어냄으로써 오히려 분단 70년사를 색다른 양각으로 조각해내는 소설적 성과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승우·소설가
♦퇴역로봇
임수현의 ‘퇴역로봇’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DMZ를 따라 횡단하는 두 명의 인물/화자를 보여준다. 이들은 신분과 처지와 사연이 다르지만 ‘걷는 자’라는 점에서 같다. 핵심적 인물은 전쟁을 위해 적의만을 내장한 채 만들어진 로봇 병사. 그는 남북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갑자기 제 일을 잃고 그러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하는 일과 역할을 통해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이에게 그 일과 역할의 상실은 곧 존재 의미를 빼앗긴 것을 뜻한다. 일과 역할이 또렷했을 때 이 로봇병사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았다. 독자는 놀라지 않는다. 인간인 우리 역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다. 그런 점에서 로봇은 인간적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생긴다는 것, 그리고 그 자기 찾기의 방법이 횡단의 걷기라는 건 고전적이지만 뜻깊다.
존재에 대한 자각과 질문은 역사의 끝자락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모색이 횡단, 가로지르기로 형상화된다. 우리는 국토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이 인물과 독서로 동행하며 그의 회고와 관찰, 그리고 끝없는 질문과 성찰을 공유한다. 그 과정에서 DMZ 공간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 일화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쩌면 사소하다. 중요한 것은 되풀이되는 질문을 통한 그의 사유이다. “나의 마지막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는 자기의 시작을 안다. 그는 적의를 표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마지막은?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 죽음에 대해 사유하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끝없이 사유하며 걷는 이 로봇 병사는, 이 작가의 잦은 표현에 의하면, 인간을 ‘시늉한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에 이르러 인간에 접근했다.
자신의 존재 의의와 삶의 목표를 잃은 상태에 있다는 점에서 이 길을 걷는 다른 화자인 인간 ‘나’는 퇴역 로봇과 처지가 같다. 그 역시 자신의 역사를 횡단하여 새로운 자각에 이르러야 한다. 이 두 인물은 각자 따로 걸으며 회상하고, 성찰하고, 마침내 새로운 자아를 수용하는 데 이른다.
작가는 이들의 걸음에 순례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순간 그들이 걷는 길은 성지가 된다. 역사적 장소로서의 DMZ는 존재의 초월이 이루어지는 내면의 성소로 화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차용할 상징적 장소로 DMZ 만한 것이 없다. 임수현은 그 점을 잘 포착했고, 이 익숙한 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의미를 부여했다.
걷는 사람을 내세울 때 서사는 단선의 플롯을 갖게 되고, 그래서 단조로워질 위험이 있다. 이 소설 역시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화자를 바꿔 서술하는 것으로도 이 위험은 쉬 극복되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이 플롯에 대한 작가의 도전이 꽤 과감하다는 뜻이다. 울퉁불퉁한 서사의 오르락내리락, 예컨대 사건과 일화들의 연쇄를 통한 전개를 포기할 때 소설 창작자가 의지해야 하는 것은 사유와 문장력밖에 없다. 실은 사유와 문장력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유는 문장을 통해 이루어지고, 문장은 사유에 의해 만들어진다.
임수현은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유도하는 대신 하나의 화두를 던지며 소설을 시작하고 그것을 끝까지 견지한다. 예컨대 자기 임무를 빼앗긴 로봇이 처음으로 하는 질문. 나의 마지막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사건의 굴곡으로 피하는 대신 그는 끈질기게 이 한 겹의 질문을 물고 늘어진다. 소설을 읽다가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사유와 문장력은 실은 끈질김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루어져 있구나. 끈질김이 사유와 문장력의 근육이구나. 시적인 표현들과 잠언적 문장들이 이 단조로운 이야기에 겹을 만든다. 독자는 감상과 치기로 떨어질 수 있는 위기가 번번이 반복과 변주에 의해 극복되는 곡예를 여러 번 목격한다. 생각과 문장으로 끈질기게 걷는 길. ‘퇴역로봇’은 언제부터인지 우리가 무심해진 소설의 한 진경을 보여준다.
김인숙·소설가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
여기, 어느 행성이 있다. 지구인들이 3000년 전에 이주해온, 혹은 탈출해온 곳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바다 위에서 산다. 그들이 고래라고 이름붙인 정착지는 살아있는 작은 어종들의 군체다. ‘살아있는 땅’에서 흘러다니며 사는 사람들. 땅- 즉 고래가 죽으면 발 디딜 곳을 잃게 되는 사람들. 곧, 죽음. 무엇보다도 그들이 잃은 것은 희망이다. 미래와 변화에 대한 희망, 잃었다기보다는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그들은 3000년 전에 이 행성으로 이주한 그들 조상의 선택을 저주한다.
최근 들어 흥미로운 SF 소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간 소식이든, 서점의 매대에서든 그렇다. 독자들에게 그만큼 가까워지고 친숙해졌다는 뜻일 테다. 아시모프나 브래드배리의 고전적인 SF 소설에 익숙했던 독자들은 현대 작가들의 다양한 SF 소설들을 통해 우주에 대한 상상력을 확장할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 대한 환멸을 심화한다. 우주는 희망을 상징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구, 말하자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의 온갖 부조리를 비틀기 위한 또 다른 차원이다. 공간이라고 표현하든 차원 혹은 시간이라고 표현하든 마찬가지다. 지구의 기억을 가진, 지구인이 쓴 우주의 이야기는, 결국 지구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상상력을 확장하는 세계와 차원에서 던지는 질문들은 통렬하다. 그것은 환상이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바로 오늘날의 우리 현실이다.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은 열 두편의 짧은 소설들을 모아 놓은 소설집이다. 열 두편의 각기 다른 소설들을 통해 시간과 차원을 확장하는 이 소설집은 빠르게 읽힌다. 매번 다른 상상력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의 마지막 단락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내가 쓰고 있는 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어떤 이야기에든 끝은 없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삶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구는 계속될까? 모든 SF 소설들이 던지는 질문을 듀나는 듀나답게 던지고 있다.
김동식·문학평론가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
1990년대까지 한국의 SF 소설은 미소 대립의 냉전 논리를 대변하는 소설이거나, 판타지적인 상상력의 문법으로 아동문학 내부에 자리를 잡은 소설이거나, 미래사회에 대한 낭만적 공상이 과학의 모습으로 포장된 소설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에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1987)과 같은 대체역사소설이 SF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제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본격 SF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신선함을 느끼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컴퓨터 통신과 함께 등장한 듀나는 조금 많이 달랐다. 듀나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왔을까. 엄청난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였을까.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듀나가 새로웠던 것은 그동안 한국사회의 그 어딘가에 숨어 있던 SF 광(狂) 또는 SF 마니아라고 할 수 있을 사람들이 묵묵히 SF를 읽는 독자에서 SF 소설을 쓰는 작가로 몸을 바꾼 장면과 관련이 있었다. 1990년대는 그런 시대였다. 골방에서 무수한 비디오를 보던 영화광 류승완이 영화감독이 되고, 헤비메탈 마니아 이석원이 ‘언니네이발관이’라는 밴드를 만들고, SF 광 듀나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글쓰기 주체로서 자리를 잡은 시대.
듀나의 특징은 SF의 정전적인 작품들이 이야기하지 않았던 지점들을 문제 삼으며 그 입구까지 독자들을 이끈다는 점에 있었다. 정말 흥미롭게도, 그 입구 또는 문턱 앞에서 멈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듀나의 SF 소설들에는 다른 소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그 어떤 여운이나 여백의 미학이 드리워져 있다는 상찬이 주어졌다. 또한 SF 문학이 감당해야 할 미래사회적 갈등을 상상하거나 재현하는 데 있어 치열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함께 주어졌다.
소설집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을 검토하면서 듀나의 소설이 이제 30년이라는 자신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듀나는 SF 소설을 쓰고 있다. 다만 이제는 SF의 정전에 대한 참조의 틀이 간접화되어 있으며 본격 소설보다는 다양한 이야기의 영역에서 SF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함께 심사한 모 심사위원의 지적처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면서도 재미있게 읽힌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있었다.
기후변화로 육지의 터전을 잃고 해양생물의 군체(群體) 위에서 살아가는 인류의 모습을 그린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 드라마 안과 밖을 오가며 우리가 현실이라 믿으며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대본 밖에서’, 발자크의 ‘인간희극’ 전편을 읽은 예술체험을 사고파는 시대의 작가와 글쓰기에 대한 소설인 ‘가거라, 작은 책이여’, 화성침공이라는 SF적 주제를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입하여 대체역사적 서사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화성의 칼’, 시간여행의 쌍방향적인 운동성을 플롯으로 채용하여 다중우주의 시간선(時間線)을 간결하게 보여주는 ‘도둑왕의 딸’ 등. 지구와 인류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우리가 살아야 할 세계와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어떤 세계와 어떤 현실을 상상할 것인가 등등의 물음.
듀나의 역할은 이러한 물음의 바로 앞까지만 독자인 우리를 데리고 간다는 데 있다. 그는 미래학적인 지식에 근거해서 세계의 미래나 인류의 운명에 대해 추궁하지도 않고 상투적인 설교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다만 기존의 SF 소설들이 보여준 미래사회에 대한 상상력에서 빈틈을 찾아내고 그 지점을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지렛대로 이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현재 듀나는 한편의 SF 소설을 그 어떤 평행우주가 생성되는 과정이거나 또 다른 다중우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유안은 우주를 상상했다. 무한히 쌓인 얇은 종이 더미와 같은 우주. 각각의 종이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상상하는 사람들은 그 밑의 종이에 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변형된 우주 속에서 또 이야기를 만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이런 식으로 처음엔 모두 똑같았던 우주들이 각각의 우주 속 이야기꾼에 의해 변형된다…”(‘대본 밖에서’, 126쪽)
층층이 쌓인 SF 소설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형되는 다중우주의의 모습은, 프로이트가 말한 바 있는 신비한 글쓰기 판(mystic writing pad)을 닮았다. 여전히 SF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작품들이라면,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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