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세입자들이여, 건투를 빈다
지난해 전세 사기를 당했다. 다행이라면 주택도시보증공사(HUG·허그)를 통해 전세금을 찾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처럼 보증금을 되찾은 경우엔, 정부가 인정하는 전세 사기 피해자 범주에는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스트레스가 컸다. 임대인과 서류 문제를 정리하는 과정, 허그와 전화 상담을 할 수 없어 답답했던 상황, 적절한 새집을 찾기 힘들었던 점, 그리고 끝까지 마음 졸이게 했던, 혹시나 못 돌려받으면 어쩌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까지…. 초봄부터 여름이 다 가기까지 울고 싶은 시기를 보낸 뒤 마침내 지급 결정을 받았다. 8월 말엔 알맞은 새집도 찾았다. 양자가 날인한 임대차 계약서를 챙기고 있는 그때 담당 공인 중개사가 건넨 말. “그러게 왜 그런 집엘 들어가요. 확인을 잘 해야지.”
작년 이맘때 처음 본 공인 중개사와 그럭저럭 잘 지냈다. 내겐 없는 도도함과 거만한 말투에 어떤 내면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호감이 비호감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 입에선 가시 돋친 말이 나왔다. “네, 제가 잘못해서 사기를 당했습니다.” 상대방은 그런 뜻은 아니었다고 짧게 해명했으나, 내 마음은 이미 구겨진 뒤였다.
나는 인생의 약 3분의 2를 세입자로 살았다. 나름대로 ‘프로 임차인’이다. 이런 사기는 처음 당했기에 충격이 컸다. 돌이켜보니 위험 요소가 있기는 했다. 부주의했다고 말한다면 그래, 부주의했다. 그러나 그것이 세입자인 내 잘못인가. 왜 피해자가 칠칠치 못해 피해를 보았다는 말을 세상은 이토록 간단히 할까. 이건 마치 노출이 심한 옷을 입어서 추행을 당했다, 만만해 보여서 학교 폭력을 당했다는 식 아닌가. 전혀 논리적이지 않지만, 많은 이가 쉽게 내뱉는 말이기도 하다.
올가을 이사 예정인 이들은 기록적 폭염 속에서 셋집을 구하러 다녔을 것이다. 그들이 느낄 불안은 전세 사기 특별법 개정안 의결 소식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계약 기간 그 집 왕은 임차인이며, 보증금은 당연히 그의 손에 돌아와야 한다. 왕 된 자의 그런 도도한 마음을 그러모아, 세입자들이여, 올 하반기 이사철에도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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