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묵의 90년대생 시선] 2036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다면
폐막식이 끝나고 2024년 파리 올림픽을 언제 했냐는 듯이 세계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스포츠를 거의 안 보는 나에게도 올림픽의 여운은 여전히 길게 남아 있을 정도로, 올림픽은 실로 세계인의 축제였다.
1994년에 태어난 나는 앞선 세대의 모두가 회고하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전설을 당연히 보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교에 진학하고 20세기 역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를 사후적으로나마 배웠다.
올림픽이 순수하게 스포츠맨십을 겨루는 축제라지만, 역설적으로 4년에 한 번씩 모든 세계인이 지켜본다는 그 이유로 올림픽은 자주 정치와 결부되었다. 텔레비전이 보급되며 올림픽 기간을 노려 정치적 선전 효과를 노리고자 하는 시도도 잦아졌다. 여기에는 당시 시대적 화두였던 식민지, 인종차별 문제와 미소 초강대국의 냉전이 ‘단골 소재’였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미국의 흑인 메달리스트들이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검은 장갑을 끼고 팔 하나를 조용히 치켜드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팔레스타인의 테러 조직인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들을 인질로 잡아 대치하다가 인질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는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의 올림픽 집단 보이콧이 펼쳐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항의하며 20국 이상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참가를 거부했다. 그 이후 미·소 초강대국이 각각 주고받은 올림픽 보이콧은 냉전을 상징하는 장면이 되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며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 진영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집단 보이콧했고, 소련도 보복에 나섰다. 동구 공산 진영이 1984년 LA 올림픽에 출전하지 않으며 ‘반쪽 올림픽’이 연달아 이어졌다.
탈냉전의 분위기를 타고 자유 진영, 공산 진영, 제3세계가 모두 참가한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세계사적 의미는 이전의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진정으로 드러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40년을 거치며 세계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식민지가 모두 독립하고, 인종차별은 허용되지 않았고, 공산권 철의 장막은 허물어지고 있었다. 식민지 출신으로 번영한 산업 국가가 되어 민주화까지 이룬 1988년의 한국은 탈식민화와 냉전이라는 전후 40년의 세계사를 총결산할 자격이 있는 국가였다. 서울 올림픽은 한국과 세계를 둘러싼 거대한 정치적 사건들을 뚫고 나온 뒤에야 가장 비정치적인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탈냉전의 평화가 끝나고, 세계 질서가 요동치면서 올림픽의 정치도 부활하는 모양새다. 이번 파리 올림픽 개막식 논란은 그 상징이었다. 개막식에서 표현된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는 서구의 문화 엘리트들과 그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펼쳐졌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올림픽 출전이 거부된 러시아는 연일 파리 올림픽을 비난하며 가세했다. 공화·민주 양당으로 정치적 대립이 극심해진 미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다음에 개최될 2028년 LA 올림픽에서도 비슷한 대립 구도가 펼쳐질 개연성도 매우 높다.
자연스레 2036년에 서울에서 다시 올림픽을 개최하겠다는 오세훈 시장의 계획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만약 지금 한국에서 올림픽과 같은 세계인이 주목하는 국제 행사를 열었을 때, 우리가 세계인에게 던질 수 있는 메시지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1988년 서울 올림픽은 건국 이후 40년간 한국이 이루어낸 역사 자체가 세계인을 향한 메시지가 되었다. 지정학적 대립, 문화적 갈등, 기술과 기후의 위기가 가속화되는 오늘날에 이제 한국은 우리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올림픽 개최에도 의미를 발굴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가 된 대한민국의 세계적 책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 그런 비전과 합의가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올림픽을 진정으로 유치하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브랜드는 무엇일지부터 더욱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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