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울분 사회

김민철 기자 2024. 8. 28.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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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화병은 화를 잘 해소하지 못하고 참아서 생기는 우리 고유의 병명이다. 참고 견디는 것을 미덕으로 보았던 문화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미국정신의학회에서 발간한 정신 질환 분류 책자(DSM)에 한때 ‘Hwa-Byung’이란 영문으로 실리기도 했다. 예전에는 중년 여성에게 많이 나타났지만 스트레스가 많아지면서 발생하는 나이도 낮아지고 남성들도 화병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통독 이후 큰 환경 변화로 많은 동독 주민들이 혼란을 겪었다. 많은 사람들이 실직하거나 고향을 떠나 이주해야 했다. 사회적 차별까지 겪으며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주민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신체적인 증상까지 나타났다. 베를린 샤리테 대학의 미하엘 린덴 교수는 이 증상을 지속적으로 연구해 ‘울분(embittermen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 증상이 큰 정치·사회적 급변만 아니라 직장 갈등, 이혼, 해고, 지인의 사망 등 일상생활에서 부정적 경험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독일판 화병’인 셈이다.

▶'울분’이 나오는 기사를 검색해 보면 공통점이 있다. ‘내 노력과 기여가 무시당했다’는 것이다. ‘공정’ 문제와 닿아 있다. 2020년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때 취업 준비생들이 울분에 찬 것도 이런 이유였다. 2018년 평창 올림픽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구성할 때 일부 한국 선수가 탈락하자 2030세대는 “불공정하다”고 울분을 토했다. 통독 과정에서 나타난 울분 증상도 바뀐 세상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났다.

▶우리 국민의 절반(49.2%)이 장기적인 울분 상태에 놓여 있다는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사 결과가 나왔다. 젊은 층에서 비율이 더 높았다. 놀랍게도 이 비율은 독일인을 대상으로 비슷하게 조사한 결과치(15.5%)의 3배에 달했다. 다만 이번이 네 번째 조사인데, 과거 세 차례 조사(2018년 54.6% 등)보다는 약간 수치가 낮아졌다. 연구진은 “우리 사회 구성원의 울분 감정이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는 ‘울분 사회’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한국은 분명 성공한 선진국인데 왜 그런지 궁금하다. 한국은 타인과 비교가 일상화되고, 경쟁이 심한 사회인 탓일까.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하루 평균 자살 사망자 수가 37.7명에 이르는 것도 이와 관련 있을 듯하다. 경쟁이 불가피하다면 공정한 경쟁에 사회가 더 관심을 쏟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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