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화내는 여자, 싸우는 여자, 사랑하는 여자
밤길을 조심해야 한다. 묻지마 범죄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화장실을 이용할 때 조심해야 한다. 몰카에 찍힐 수도 있으니까. 연애상대를 신중히 골라야 한다. 이별을 고했다가 살해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한다는 사실이 티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페미’로 낙인찍혀 조리돌림당할지도 모르니까. 여성혐오 범죄의 빈도를 과장하는 것 같은가. 최근 한 달로 아주 좁게 범위를 제한해도 지금 조심해야 한다고 열거한 일들의 실제 사례를 기사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조심해야 할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SNS에 올린 사진이나 증명사진이 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불법 합성물(딥페이크) 성범죄에 악용될 수 있으니까.
딥페이크를 이용해 불법으로 제작한 성착취물을 유포하는 일명 ‘지인 능욕방’이 최근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여성의 사진을 보내면 음란물을 합성해주는 텔레그램 채널의 가입자가 무려 22만여명이라고 한다.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 학교 명단에 포함된 학교는 100개 이상이며, 이 학교들을 대상으로 점검한 결과 최소 40곳에서 실제 피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비판하는 기사를 쓴 기자나 이러한 범죄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려 노력하는 교사들까지 마구 합성하라는 채팅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을 더한다. 그런데 어떻게 조심할 수 있을까? SNS에 사진을 올리지 않더라도 졸업 앨범에 실린 사진까지 악용하고 몰래 찍은 사진으로 합성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피할 수 있다는 말인가. 피해자가 무작위로 선택된다는 점에서 성범죄는 일종의 테러리즘과 같다는 수전 그리핀의 의견에 동의하게 된다.
N번방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는 불안했고 분노했다. 여성들이 처음 본 남자에게, 애인에게, 남편에게, 스토킹범에게 아무 죄도 없이 맞거나 죽임당할 때마다 우리는 울분을 토했다. 처벌을 강화하고 성차별을 해결해나갈 방침을 마련하자고 외쳤다. 조심하고 두려움에 떨며 분노하기를 무한정 반복해왔다. 그런데도 계속, 새롭게 진화한 형태의 혐오범죄가 나타나고 또다시 화내고 싸워야 한다니 막막해진다. 그 과정에서 여성들이 체념과 무기력을 배우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괴로움을 뜻하는 ‘anguish’와 같은 어원을 지닌 분노(anger)는 감정의 주체를 아프게 한다. 어떤 때는 완전히 파괴하여 폐허로 만들기도 한다. 그런 고통 속에 상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해사하게 웃고 밝은 이야기를 나누고 따스한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분노하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한 물러섬이야말로 여성들을 그렇게 대해도 된다는 왜곡된 사고를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서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바다출판사·2020)에서 미국 작가인 에이드리언 리치는 여성들이 “자신에게 너무나 적대적인 세상”에서 체화할 수밖에 없는 내면의 분노를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이드리언 리치는 ‘어머니’로 특정하고 있지만 넓게 해석해 보자면) 선배 여성들이,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익힐 수 있도록 매우 심오하면서도 용기 있는 사랑을 주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실제적인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분명히 밝히고 확장”함으로써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며 이는 “희생자 되기를 거부하는 것,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성들은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불법 합성물 피해를 당한 여대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직접 가해자를 찾아내어 처벌받게 만들었으며 그 경험을 공유했다.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안위를 돌보며 용기를 나누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 단단히 주먹을 쥐되 그 안에 다른 손을 거머쥘 넉넉한 품을 남겨둔다. 그 견고한 사랑의 자세를 믿는다.
성현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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