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피할 수 있어도 즐겨라
책장 정리를 하다가 2001년 1월 논산훈련소에서 보내온 아들의 편지를 발견했다. ‘아버지, 내무반 끄트머리에 자리가 배당되어 밤에 추워서 잠을 잘 못잡니다. 아버지 친구분한테 연락해서 자리 좀 바꿔 주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이었으면 좋겠다. 하늘은 장차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에게 담금질과 벼름질을 한다’는 요지의 답장을 보냈다.
피할 수 있어도 감내(堪耐)하자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인간은 각고면려(刻苦勉勵)의 노력을 통해서 사회적 나이를 먹고, 깨침을 얻어 성장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
한편,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사람마다 고통의 양은 다를 수 있지만 한 사람이 일생동안 겪어야 하는 고통의 양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통은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Challenge & Response)’이라는 패러다임과 같은 맥락이며,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시련을 학창 시절에, 사회 초년에, 아니면 중년 이후에 겪을지는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고통을 당했거나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에서 위로받을 일이다.
이럴 땐 ‘돈님이여, 나갈 때 애먹이지 말고 나가소서!’라는 어느 친구의 우스갯 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기부나 쾌척(이것도 일종의 고통이라 할 수 있다) 행위는 궂은 일로 돈이 나가는 것을 줄여준다는 게 친구의 지론(持論)이다. 골프에서 홀인원 했을 때 남들에게 밥을 사면 좋은 일이 있다는 이야기처럼 각각의 일들 사이에 유의미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봄에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다. “부럽습니다”. 하동을 출발하여 산청 함양을 넘어 전북 운봉을 지나 남원으로 향하는데, 이제 막 남원을 출발해 필자와 역방향으로 가던 분이 던진 말이다. 150여 ㎞를 걸어온 필자가 부럽다는 뜻이다. 하지만 270여 ㎞의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어떤 방향으로 걷든, 구간마다 만나는 지형의 기울기야 차이가 나겠지만, 그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의 총량은 같다. 물론 어떤 높이의 산을 걷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고통의 총량은 다르다.
인생 또한 그럴지니, 태생적·후천적 삶의 부하(負荷)는 사람에 따라 ‘크기와 기울기’가 다르겠지만 각자의 삶이 힘들기는 마찬가지.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내 인생이 가장 고달프다고 여길 것도 없다. 시련을 성숙의 발판으로 삼는 게 최선의 방책이다.
종종 다윗 왕을 떠올린다. 그는 환희가 넘칠 때 교만하지 않고 절망에 빠졌을 때 좌절하지 않기 위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글귀를 자신의 반지에 새겨 지녔다고 한다. 영원할 것 같은 기쁨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난도 언젠가는 다 지나간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내 삶을 긴 호흡으로 돌이켜보면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명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희로애락(喜怒愛樂)을 관조(觀照)하는 게 삶에 대한 최선의 예의(禮儀)라 했다. 이것이 바로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궁극의 메시지일 것이다.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을 알고 난 후에도 어떤 이들은 개개인이 평생 감당해야 할 고통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그 사실은 수긍하면서도 이 법칙은 탈출의 길이 없다고 단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인간을 해방시켜 주는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현재의 패러다임을 계속해서 고집하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세계관이 없는 경우가 된다. 세 번째를 택한 사람들만이 자신을 창조적으로 긴장시키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이 겉으로는 인간이 짊어져야 할 고통의 무게에 대해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살아가야 할 태도에 대한 얘기다.
‘내 등의 짐’이라는 시가 그걸 알려주고 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 살고 있을 것입니다 /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 내 삶의 무게가 되어 /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 나를 성숙시킨 /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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