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외친 만민평등…해월 최시형의 삶 따라가다

조봉권 기자 2024. 8. 28.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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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동학농민혁명길 문화답사

- 한울·사람·자연을 모신 동학정신
- 2대 지도자 해월 선생의 실천사상
- 위태로운 이 시대에 길잡이 되어줘

- 동학 접주제 첫 실행한 포항 매산리
- ‘이필제의 난’ 혁명의 발상지 영덕
- 수년간 살며 공동체 가꾼 영양까지
- 곳곳에 서린 해월의 발자취 톺아봐

처음으로 닿은 곳은 검등골 입구였다.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마북리에 들어서서 조금 더 산 쪽으로 올라서자 상마북저수지가 나왔다. 실하면서도 고즈넉하고 깨끗한 느낌을 간직한 이 저수지는 상수원보호구역이라 출입이 통제돼 답사 일행은 멈춰야 했다. 포항의 중요한 문화단체인 ㈔동대해문화연구소 김상조 이사가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천도교인이며 ‘김상조의 문화답사기’ 연재 등으로 지역사회에서 잘 알려졌다.

“이곳 마북에서 골짜기를 따라 더 올라가면 검등골입니다. 검곡(劍谷)이라고도 합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산속의 묵은 터전이지요. 1980년대까지도 화전민이 살았습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께서 서른세 살 되던 1859년 들어와 1864년까지 화전민으로 지낸 곳이고요.” 검등골은 천도교의 중요한 유적지이다.

근처 신광면 기일리 ‘터일 제지소’에서 17세부터 종이 만드는 일꾼 생활을 했고, 머슴살이도 했다는 해월 최시형 선생은 스물여덟 살이던 1854년 당시 경주 승광면 마복동(현재 포항시 신관면 마북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6년 동안 마을 대표인 집강으로 활동하다가 이곳 검등골로 삶터를 옮긴다. 동대해문화연구소가 펴낸 ‘포항 사람 해월 최시형-찾아가는 강연회’ 책자에 따르면 동학에 대한 관의 지목을 피해 도망하는 차원도 있었고 가난한 화전민으로서나마 자기 농사를 짓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지난 24일 ‘부산 시민과 함께하는 동학농민혁명의 길 답사-해월 편’ 일행이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매산리 큰 나무 아래 서 있는 ‘최초의 동학 접주제를 실행한 매산리(매산동)’ 표지판을 살피며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숨결과 자취를 찾아

지난 24일 부산인권포럼·㈔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동학농민혁명부산기념사업회가 주최한 ‘부산 시민과 함께하는 동학농민혁명의 길 답사-해월 편’이 경북 포항·영해(영덕)·영양 일대를 돌아보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21세기에, 이 위험하고 위태로운 시대에 우리가 함께 돌아보고, 다시 깊이 들여다봐야 할 사상가·철학가로 동학을 이끈 해월 최시형(1827~1898) 선생을 꼽는 사람이 꽤 많다. 조선 후기 수운 최제우가 창도하고, 해월 최시형이 2대 지도자로 이끈 동학은 알게 모르게 우리 삶에 폭넓고 큰 영향을 끼쳤다. 무위당 장일순의 사상, 시인 김지하의 생명 사상, 한살림공동체, 소파 방정환 선생이 이끈 세계 최초 어린이날 제정과 어린이 헌장 발표…. 동학혁명도 있고, 1919년 3·1 만세운동 또한 실상 동학의 힘이 바탕이 되어 일어나고 퍼졌다. ‘졸업식 노래’를 작곡한 정순철은 해월 최시형 선생의 외손자이다.

‘해월 최시형을 떠올리는 2021년’(국제신문 2021년 1월 18일 23면) 등의 칼럼도 써가며 소박하게나마 해월의 사상을 알아보고 느껴보려던 처지라, 이런 답사가 마련된다는 소식은 반가웠다. 주저 없이 동참했다.

초기 동학 공동체가 있었던 경북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윗대티 마을을 돌아보는 답사단.


▮구체성 넘치고 간명

해월 최시형의 삶 자취를 따라가는 문화 답사인 만큼, 해월의 사상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먼저 정리해두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는데 주최 측은 ‘환상의 조직력’을 발휘했다. 포항에 갔을 땐 동대해문화연구소 구성원이 출동해 설명하고 안내했다. 영해로 가니 ‘1871 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 권대천 위원장 등이 성심과 성의를 다했다. 영양으로 넘어가자 ‘인시천(人是千) 영양 동학 해월 최시형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이상국 영양학 연구소 소장이 일행을 맞이해주었다. 요즘 세상에 쉽게 보기 힘든 협력과 나눔의 광경이었다.

해월은 ‘내수도문(內修道文)’에서 이런 가르침을 ‘19세기 조선 시대’에 실천했다.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것이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 오니…. ” ‘대인접물(待人接物)’에서도 강조했다.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 한울님이 싫어하고 기운이 상하느니라…” 충청도의 교인 집에 들어섰을 때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었다. 해월이 교인에게 ‘지금 베를 짜는 사람은 누구인가’ 여러 번 물었다. 교인은 “며느리”라고 답했다. 해월은 ‘그렇지 않다. 지금 한울님이 베를 짜고 있다’고 했다.

만물에 하늘이 깃들어 있다고 했으니, 여성과 어린이도 하늘 대하듯 대등하고 평등하며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고 해월은 100년 전 말기 증상에 시달리던 조선 후기에 가르쳤다.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은 해월의 삼경 사상의 핵심이다. 경천·경인에 머물지 않고 경물까지 나아간 점은 시대 상황에 비춰보면 놀라운데 심지어 ‘저 새소리에도 하늘이 있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시아버지도 며느리를 한울님처럼 모셔야 하고 어린이를 보듬고 생태·생명을 사랑하자는 가르침은 21세기인 지금 봐도 생생하고 절실하며 아름답다.

해월은 “일이 있으면 사리를 가리어 일에 응하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서 마음공부를 하라. 말을 많이 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심술(心術)에 가장 해로우니라”고 통렬하게 지적했다. 관념과 사변에 절어 있던 지배층 지식인의 고약한 습성을 나무라고 심플 라이프(simple lief)의 가치를 꺼낸다. 해월의 말과 가르침은 어렵지 않고 간명하다. 삶의 언어로 구체성을 끌어올려 말한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이번 답사는 바로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몸으로 느낀 시간이었다.

경북 영덕군 영해면사무소 앞에 세운 ‘최초의 동학혁명 발상지’ 비석. 뒷면에 도울 김용옥 선생의 글을 새겼다.


▮발길 닿는 곳마다

검등골에서 살던 해월은 경주에 가서 수운의 가르침을 받고는 저녁을 먹고 다시 90리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는 몸을 써서 일했다. 머슴살이도 했고, 터일 제지소에서 종이 만드는 노동을 하며 종이를 ‘배달’하기 위해 멀리 다녔다. 그런 ‘생활인’이었으니 생기 넘치는 언어가 나왔다. 싱싱하고 생생한 몸의 구체성이 가슴에서 발효하고 뇌리에서 사상으로 맺혔다. 지식인이고 사상가인 수운 최제우가 민중의 삶을 알고 몸의 구체성을 몸에 축적했으며 성실히 마음을 닦은 해월에게 도통을 전한 안목은 빛난다.

일정은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만석리 들판에 서 있는 ‘해월 선생 어록비’로 이어졌다. 1998년 여러 천도교인이 힘을 모았고, 이 동네 신광중학교에 다니던 이향미 학생에게 부탁해 글씨를 쓰도록 한 뒤 돌에 새겼다. 예술계 명사보다 동네 중학생 글씨를 택한 발상은 눈길을 끌었다. 포항시 흥해읍 매산리는 ‘최초로 동학 접주제를 실행한 마을’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비로소 동학이 민중 속에서 꽃을 피우고 체계를 갖춘 중요한 마을이다. 어쩌면 평화·평등·대등·인권·자립을 내세운 동학혁명의 씨가 뿌려진 곳이다.

영해로 넘어가자 ‘최초의 동학혁명 발상지’ 비석이 아주 인상 깊었다. 1871년 영해에서 일어난 이른바 ‘이필제의 난’을 진정한 혁명이라 할 만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권대천 위원장은 조목조목 설명해 주었다. 이 비석 뒷면에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 쓴 문장을 새겼다. 그중 한 대목이 이렇다. “19세기 중엽에 조선대륙에서 흥기한 동학혁명사상은 프랑스의 인권선언보다도 훨씬 더 근원적인 범인류적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일월산 품속 영양으로 가니 자생화공원에 ‘동학 해월 최시형 선생 은거 유허비’를 세워두었다. 해월이 1865년부터 1871년까지 살며 공동체를 가꾼 마을이라고 한다. 여기서 좀 떨어진 윗대치로 가니 해월이 그 시절 살던 마을이 있었다. 이상국 회장은 “이 마을에서는 한울을 모시고 자연을 모시고 사람을 모신 동학의 자취가 서려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문명 전환의 비전을 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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