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고전 음악은 우리의 것 [김민형의 여담]

한겨레 2024. 8. 28.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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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음악제 누리집 갈무리

김민형 | 영국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우리 아이들이 어렸던 시절에 일 때문에 유럽의 국가들을 돌아다니다 어린이를 위해 쓴 역사책을 자주 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럴 때면 나도 그림이 곁들여지고 쉬운 문체로 쓰여서 가볍게 읽을 만한 책들을 들여다보면서 각 나라 국민의 정체 의식이 어느 정도 파악된다는 인상을 받았다. 짐작할 수 있듯이 아이들을 위한 책은 애국적인 내용이 지배적이었다. 그중에는 위대한 지도자나 전투도 많이 언급되고 침략자들을 무찌르는 용감한 국민 영웅의 모험담도 당연히 포함됐다.

잘 알려졌으면서도 우리 입장에서 보았을 때 특이한 점 하나는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역사를 자국의 전통에 포함시킨다는 사실이다. 로마 제국은 유럽의 상당 부분을 언젠가 정복한 일이 있어서 사방 곳곳에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에 여러 지역 역사에 포함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동과 북아프리카도 로마의 큰 부분이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무게 중심은 지중해로 보는 것도 타당하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우리가 로마 제국을 침략했다’는 내용을 읽은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통상적인 로마 역사를 보면 제국을 침략해서 멸망시킨 게르만 민족 이야기가 중대하게 다루어지고 그들의 후손은 지금의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 역사책은 ‘로마 제국을 야만족이 침략했다’고 기술하면서 로마인들을 현재 국민의 조상으로 여기는 심리가 여기저기에 암시돼 있다.

이렇듯 어떤 나라의 과거를 지나쳐 간 여러 사람 중 국민의 조상을 누구로 정하느냐의 문제는 간단치도 않고 상당한 선택의 여지가 있다. ‘위인’을 조상으로 차지하고자 하는 열망은 흔해서 가령 알렉산드로스 대제를 둘러싼 ‘소유권’ 문제는 현재 발칸 반도 내에서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다. 프랑크 제국의 카롤루스 대제 같은 인물도 독일과 프랑스 양 쪽에서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하며 서로 견제하던 시절이 그다지 먼 옛날이 아니다.

‘역사의 역사’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스 로마 전통을 유럽의 공동 유산으로 비교적 일관성 있게 간주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꽤 최근 현상이다. 가령 렘브란트의 유명한 17세기 그림 ‘클라우디우스 키빌리스의 음모’는 로마 식민 통치에 저항한 바타비아 족 우두머리의 업적을 기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항해 싸운 베르킨게토릭스가 프랑스의 그림이나 조각품에 흔히 등장하고 독일에서는 기원 9년에 토이토부르거 숲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무찌른 게르만족 아르미니우스를 ‘최초의 독일인’으로 묘사하는 관습이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쓰인 역사책 안에 흔하다. 그리스 문화의 ‘유럽화’는 이보다 더 복잡한 역사적 경로를 거쳤기 때문에 이 짧은 글에서 다루기 힘들다. 그러나 지금은 유럽 전역에 퍼진 그리스 로마 전통의 국유화가 상당한 노력과 정치적 의지의 산물인 것은 분명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 전통이 어떤 의미에서 유럽인의 소유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한마디로 ‘현대 유럽인들이 그 문화를 아끼고 공부했기 때문’이다. 인종의 경계도 불분명하고 지역적 연관도 약하지만 영국인 같으면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의 뛰어난 업적들을 숭배하며 공부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7월 말에 나는 대관령 음악제를 참관하면서 유럽의 고전 음악을 유별나게 많이 공부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현재 한국에서는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탁월한 수많은 음악인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지식은 세계 누구와 견줘도 빼어나다. 대부분 유럽 사회의 고전 음악회는 고령 관중이 주류를 이루지만 롯데콘서트 홀, 예술의전당, 그리고 대관령 음악제의 음악당에서는 젊은 열기가 타오른다. 어쩌면 내가 어렸던 시절부터 한국의 유럽 고전 음악 관객은 세계에서 제일 열광적인 수준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영국인이 고대 그리스 로마 전통을 자기의 것으로 여겼듯이 우리 자신이 유럽 고전 음악 전통의 소유자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수백년 뒤 국사책에 고전 음악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한국 이야기에 편입돼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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