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 검은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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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전설 속의 동물이었다.
비록 다른 점이 없지 않았으나, 그 거대한 동물은 상상 속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기에 '기린'이라 불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도 동물도 말로 못할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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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의 풍경동물]
오랜 세월, 전설 속의 동물이었다.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이마는 늑대와 같고, 머리엔 살에서 돋아난 뿔이 있으며, 말의 발굽을 달았다. 울음소리는 음계와 일치하고, 발자국은 원을 이루며, 천 리를 단숨에 달리고, 심지어 하늘을 난다. 영락없이 용의 머리를 한 사슴이다.
자애심이 가득해 풀과 벌레를 함부로 밟지 않고, 살아 있는 동식물을 먹지 않으면서도 천 년을 산다. 음양오행 우주의 중심에 서며, 용·봉황·거북과 함께 ‘사령’(네 마리의 신령한 동물)으로 꼽힌다. 지혜와 자비, 성스러움과 태평성대를 상징하기에 덕이 높은 성인과 왕의 표식으로도 애용됐다. 공자가 나고 죽을 때 나타났으며, 고려시대 왕의 호위군을 상징했던 동물, 기린.
한·중·일의 옛사람들은 기린을 본 적 없으면서도, 아니 기린을 본 적 없기에, 멋대로 머릿속의 기린을 그려 책에 싣고 깃발과 옷에 새겨 넣었다. 나라에 따라 모습이 달랐고,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졌다. 그때 그린 기린 그림은, 아는 기린 그림이 아니라, 모르는 기린 그림이었다.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 아이를 일컫는 ‘기린아’ 또한 우리가 본 기린이 아니라 상상하던 기린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그랬던 기린이 눈앞에 나타난 건 1400년대 명나라 때라고 한다. 정화가 이끈 세계원정대가 아프리카 케냐에서 신기한 동물을 잡아왔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비록 다른 점이 없지 않았으나, 그 거대한 동물은 상상 속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기에 ‘기린’이라 불릴 수밖에 없었다.
정화의 원정대가 머나먼 케냐에서 중국까지 어떻게 기린을 데려왔을지 상상하면 아찔하다. 사람도 동물도 말로 못할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오늘날 첨단 운송시스템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회사들도 기린 운송에는 어려움을 토로하지 않는가.
기린은 상상에 머무를 때나 현실로 다가왔을 때나 수요가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가장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동물이다. 비싼 몸값 탓에 동물원의 규모와 재정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어느새 친숙해졌지만, 여전히 비범하다. 저 거대한 키와 기다란 목에 비교 상대가 있는가. 하물며 갓 태어난 기린도 나보다 크다.(그래도 목뼈의 수는 나와 같다.) 높은 곳의 뇌까지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 거대한 펌프로 높은 압력을 유지한다. 기린의 심장은 사람보다 수십 배 크고 혈압은 두세 배 높다. 뒷발질에 제대로 맞았다간 밀림의 왕 사자도 목숨을 잃는다. 모래나 먼지를 막기 위해 낙타처럼 콧구멍을 여닫을 수 있다. 잠을 거의 자지 않는다.
진화론의 단골손님이기도 하다. 라마르크는 ‘동물철학’(1809) 제1법칙에서 “어떤 동물의 어떤 기관이든 다른 기관보다 자주 쓰면 더 강해지며, 쓰지 않으면 쇠퇴한다”고 주장하며, 그 사례로 기린을 들었다.
가까이서 기린을 볼 때마다 두 번 놀란다. 아 아 아, 너는 정말 크구나.
그리고 또 한 번, 입속의 검은 혀. 뜬금없이 기형도(1960~1989)를 불러온다.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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