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 전 폭염과 가뭄, 끔찍했던 식민지 백성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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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폭우에 이어 8월에는 폭염으로 전국이 시름을 앓고 있다.
1924년 8월의 폭염과 가뭄은 전국을 뒤덮어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폭염과 가뭄으로 인해 어쩔수 없이 끔찍한 삶을 살아야 했던 식민지 백성들이 너무나 애처롭다.
가뭄이나 폭염 등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가장 힘들고 약한 사람들에게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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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팔러 우시장 나갔다가 열사병 걸려 급사 쌀값 폭등하고 매점매석 미곡상 농간 심각 먹고 살기 막막해지자 어린 자식까지 버려 자연재해 피해는 힘없고 약한 계층에 집중
7월 폭우에 이어 8월에는 폭염으로 전국이 시름을 앓고 있다. 서울은 역대 최장의 열대야로 잠을 못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농작물과 축산농가의 피해도 속출하고 있다. 농산물 값이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요즘이다. 100년 전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그때의 모습을 찾아가 보자.
1924년 8월의 폭염과 가뭄은 전국을 뒤덮어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일사병으로 죽는 사람까지 생겼다. "황해도 금천군에 거주하는 이동선(李東善·56)은 지난 19일에 소 한 마리를 팔러 우시장에 갔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서 세상을 참혹히 떠났다는데, 원인은 일사병(日射病)으로 판명되었다더라." (1922년 8월 22일자 조선일보)
가뭄뿐 아니라 이로 인한 병충해 발생은 농작물에 큰 타격을 주었다. '수색(水色)평야의 참사'라는 제목의 1928년 8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고양군 수색면 일대 수색 평야의 농작물(벼)에는 부진자(浮塵子; 벼멸구)가 발생하여 (중략) 최근 2~3일에 이르러는 더욱 벌레가 맹렬한 형세로 늘어가서 넓은 들에 뒤덮인 볏줄기가 모두 말라 죽는 것은 실로 참담한 광경을 이루게 되고 (중략) 그곳 경찰서에서는 농민들을 독촉하여, 불을 놓아 가지고 그 벌레를 잡게 하나 2~3일 동안에 비가 아니 오면 수색 일대의 미작(米作)은 전멸이 되리라고."
농작물 피해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들은 역시 가난한 소작 농민들이었다. 먹을 곡식이 없어 풀을 베어 먹는 가난한 농민들의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나온다. "전북 김제(金堤) 지방 인민은 대부분이 농업으로 업을 삼는데 금년에는 큰 가뭄을 만나서 (중략) 그 중에도 빈민들은 굶주려 죽게 되어 4~5일 전부터 날마다 수천 군중이 김제 읍내에서 서쪽으로 2리(里)쯤 되는 성덕면 남포 넓은 강변에 모여 '나무재'라는 풀을 베어 먹기 위하여 불같은 폭양(曝陽) 아래 땀을 흘리며 한 줌이라도 더 베려고 애를 쓰는 늙은이와 아이들의 모양은 차마 볼 수 없다더라." (1924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
가뭄은 필연적으로 쌀 생산 감수로 이어졌다. '미작(米作) 감수만 240만 석'이란 제목의 1924년 8월 30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전 조선의 농작물의 상황을 들으면 금년 산미(産米)의 감수액이 2,374,174석이라. 전 조선의 감수가 1할 5푼 6리라더라. (중략) 조(粟)는 1할 4푼 2리가 감수되고 대두(大豆)는 2할 2푼 8리가 감수될 모양이라더라."
자연히 쌀값이 폭등했다. 수입 쌀을 섞어 국산으로 판매하는 간상(奸商)들이 등장했다. 농간을 일삼는 미곡상에 대한 불평은 날로 높아갔다. "요사이 쌀값이 한 섬에 3원씩이나 올라 굶어 죽는다고들 야단이라는데 (중략) 가뭄의 직접 원인보다도 가뭄을 미리 짐작하고 일본에서 건너오는 일본인 투기 상인들이 경상도를 중심으로 하고 미곡을 몰아 사는 매점(買占)이 큰 원인이라는데, (하략)" (1924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우는 사람 옆에 웃는 사람 있다'고 이런 혹심한 가뭄으로 오히려 덕을 본 사람들도 있었다. "가뭄이 심하여 농가에서는 비관의 절경(絶境)에 있는 이때 이와 반대로 홀로 복덕(福德)을 누리고 있는 곳은 천일염전(天日鹽田)이라 한다. 인천 주안(朱安)염전은 작년 1,300만 근에 달했던 소금 생산량이 올해는 8월 20일까지 1,700만 근을 돌파하고 이후의 천후(天候)가 이대로 계속하면 전에 없던 기록을 지으리라더라." (1924년 8월 25일자 매일신보)
이러한 가뭄으로 발생한 또 하나의 비극은 기아(棄兒)의 격증이었다. 어린 자식들을 버리는 것이다. "생활난에 못 이겨 자기의 혈육을 양육하지 못하고 버리는 사건은 금년에 이미 37건에 달한다는데, 대부분이 생활난을 못 이겨 생후 2~3개월 혹은 심한 자에 이르러서는 4~5세나 된 어린 아이까지 버리는 자가 있다는 바, 경성부에서는 그 아이들을 전부 제생원 양육부에 수용하고 양육 중이라는데 그 수효는 180여 명에 달한다더라." (1924년 9월 4일자 매일신보)
가뭄은 교육계에도 큰 파급을 미쳤다. "이제 9월 1일에 개학한 시내 12개 남녀 중등 정도 학교의 출석한 학생의 통계를 보건대 6,754명 학생 중에서 1,051명의 학생이 오지 아니한 것이라, 특히 보성(普成)고보는 825명 재학생 중 결석생이 239명이나 되어 전년에 못 보던 현상으로 조선 사람의 경제계가 얼마나 궁핍해 가는 가를 유감없이 설명하는 것이다." (1924년 9월 3일자 동아일보)
학교에 출석한 학생들에게도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하숙집의 밥값이 오른 것이다. "조선인 숙옥조합(宿屋組合)에서는 한재(旱災)로 쌀값이 대단히 올랐으므로 한 달에 16원을 20원으로 올리기를 당국에 청원하자고 결의하고 조합원 280명의 연명 날인으로 경찰 당국에 청원을 넣었다. (하략)" (1924년 8월 31일자 동아일보)
폭염과 가뭄으로 인해 어쩔수 없이 끔찍한 삶을 살아야 했던 식민지 백성들이 너무나 애처롭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극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은 어떠했을까. 1924년 8월 29일자 동아일보 사설이다. "원래 정치는 민생의 행복을 도모하는 바이니 위정자가 어떠한 대책을 취하는지 주목하거니와 우리는 우리로서 그 가련한 동포를 위하여 동정과 의무로 구제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어 적극적으로 전곡(典穀)을 가진 사람은 종래 자기의 사익만 위하여 활용하던 일을 폐하고 조금이라도 그 무직(無職)한 동포를 위하여 생활 자료를 얻을 만한 길을 열기에 힘쓰려니와, 우선 소극적으로 유흥 등 낭비를 조심하여 재해 중에 있는 근신(謹愼)과 성의를 표하여야 될 것이다."
풍선을 누르면 가장 약한 부분이 터진다. 가뭄이나 폭염 등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가장 힘들고 약한 사람들에게 집중된다. 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이다. 하지만 역경을 이겨내는 있는 힘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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