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정부·정치권 ‘한은 흔들기’ 자제해야
“내수진작 측면에서 보면 아쉬움이 있다”(대통령실 고위관계자)
“당장의 경기침체와 내수진작에 대응해야할 한은이 지나치게 위축됐다”(윤상현 국민의힘 의원)
“내수진작 문제 차원에서 봤을 때 약간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
지난 22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연 3.5%로 동결한 것을 두고 정부와 여당에서 나온 평가들이다. 한은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는 비판에 직면하리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발언들이지만 금통위가 끝나기가 무섭게 쏟아졌다. 나열하지 않은 발언 외에도 정부 주요인사들이 한은의 금리 결정을 비판한 것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치권뿐 아니라 국책기관에서 부는 외풍도 거세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5월부터 금리인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달에는 “금리인하가 지연되는 상황인 데다 고금리의 부정적 영향이 강하다”면서 금리인하 실기(失期)론까지 제기했다. 가계부채와 부동산 가격 급등 등 금융안정 측면이 강조되면서 내수 회복 속도가 더디다는 게 골자다.
금리 인하를 요구하는 주체가 워낙 많아 이제는 한은의 독립성이 법적으로 보장된 가치라는 것을 잊은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한국은행법 3조에 따르면 한은의 통화신용정책은 중립적으로 수립되고 자율적으로 집행돼야 하며, 자주성은 존중돼야 한다고 돼 있다. 같은 법 4조에는 정부 경제정책과의 조화도 물가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은의 독립성이 중요한 것은 한은이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이라는 책무를 동시에 짊어지고 있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재원 마련이 중요한 정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화폐를 창출하려는 욕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만약 정부의 의도대로 한은이 화폐를 계속 찍어내면 물가는 치솟고 자원배분이 왜곡될 수 있다. 이에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는 중앙은행을 별도 기관으로 둬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물가상승률이 2% 중반으로 내려오면서 물가안정은 어느정도 달성된 상태다. 그러나 금융안정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5대 은행(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의 가계대출 잔액은 지난달 말과 비교해 이달 16일까지 4조원이 넘게 불어났다. 불어난 가계대출은 부동산 가격을 자극했다. 지난달 서울주택(아파트·연립·단독주택) 매매가격지수는 전월 대비 0.76% 상승했다. 2019년 12월(0.86%) 이후 4년7개월만에 가장 큰 상승폭이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이런 위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내수 위축만을 강조하며 금리 인하를 주장하고 있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2단계 도입(9월) 등 가계대출 규제 방안이 시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은의 선제적 인하만 요구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금리를 먼저 내렸다가 가뜩이나 과열된 ‘막차 수요’가 치솟아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것인지 되묻고 싶다.
성급한 금리인하의 부작용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아직도 60%대 물가 상승률을 유지하고 있는 튀르키예가 대표적인 사례다.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중앙은행 독립성 훼손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난 2018년 기준금리를 6.25%포인트(p) 올린 체틴카야 총재를 해임하고 금리 인하를 단행한 바 있다. 이후 불과 3년 만에 물가 상승률이 8%대에서 85%로 오르면서 전국민이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튀르키예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해 3월 기준 50%까지 끌어올렸다.
현재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앙은행의 결정이 중요한 시기로 접어들었다. 세계경제를 휩쓸었던 물가 상승세는 어느 정도 잡혔지만 경제 성장세 둔화 가능성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에 스위스·캐나다 등 일부 중앙은행은 선제적으로 금리를 내렸고 일본은 엔저(円低)로 인한 내수경제 타격을 해결하기 위해 금리인상을 단행하는 등 상황에 맞게 통화정책을 다변화하고 있다. 한은도 세심하게 통화정책 전환을 준비해야 할 때다. 한은이 본연의 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권이 한은의 결정을 존중해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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