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스토리]'착한 생수' 찾는다면…무라벨보다 '이것'
플라스틱 사용량 절감·분리수거 용이
국내선 질소 사용한 생수 출시되지 않아
유럽은 생수도 다르다?
지난주에 여름을 맞아 유럽, 이탈리아 로마로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유럽 방문은 5년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다녀온 뒤 처음이었는데요. 눈만 돌리면 보이는 수많은 유적지와 유물들도 물론 멋졌지만, 직업병인지 뭔지 제가 가장 인상깊었던 건 '물'이었습니다.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유럽은 물 인심이 야박합니다. 거의 모든 식당이 물을 병 단위로 돈을 받고 팔고요. 생수 가격도 만만찮습니다. 그렇다고 마시지 않을 도리도 없는 것이 8월의 유럽은 엄청나게 덥습니다. 여행이다보니 많이 걷게 되는데 물을 사 먹지 않고는 견디기 힘듭니다.
다행이랄까 로마에는 도시 곳곳에 식수대가 있습니다. 처음엔 이게 마셔도 되는 물인가 싶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생수병이나 텀블러에 물을 받아 마시는 걸 보고는 '사람 마시는 물이 다 똑같지'라는 생각에 시도하게 됐죠. 생각보다 시원하고, 생각보다 깨끗했습니다. 알고보니 로마엔 이런 식수대가 수백개 이상 있고, 시에서 수질을 열심히 관리하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우리나라의 약수터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여행에선 늘 생수병을 들고 다니게 됩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들이 한 손에는 카메라나 핸드폰을, 다른 한 손엔 생수병을 들고 다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하게 들고 다니던 이 유럽산 생수가, 한국의 생수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한국은 미네랄 함량이 낮은 연수(軟水)고 유럽은 미네랄 함량이 높은 경수(硬水)라서 목넘김이나 맛이 달랐던 걸까 싶었지만 아니었습니다.
원인은 물이 아닌 물병에 있었습니다. 다 마신 물병을 들고 식수대를 찾다가 깨달았죠. 생수병이 너무나 가볍고, 살짝만 힘을 줘도 찌그러지지 뭡니까. 우리나라에서 마셨던 생수는 안 이랬는데, 생수병이 참 약하다 생각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병 뚜껑은 불편하게도 개봉을 한 뒤에도 분리가 잘 안 되고 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유럽의 '대충대충'을 탓하고 한국인의 꼼꼼한 손재주를 칭송하기 직전,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거 친환경이구나'
편의성<친환경
유럽의 페트병 생수는 국내에서 흔히 보던 것보다 얇고 가볍습니다. 다 마신 후 찌그러트리면 적은 힘으로도 쉽게 구겨집니다. 페트 하나에 들어가는 플라스틱의 양이 국내 제품보다 적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럽에서 사용되는 500㎖ 생수 페트 한 개의 무게는 8~9g 안팎입니다. 국내 제품은 보통 12~20g을 오갑니다.
무게가 덜 나가니 그만큼 플라스틱 쓰레기가 덜 나옵니다. 압축이 쉬워 쓰레기 부피가 적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가끔 국내 페트 제품의 경우 너무 단단해서 찌그러뜨려 버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유럽 생수들은 악력이 약한 사람도 쉽게 구길 수 있는 수준입니다. 캡이 병 입구에 매달려 있도록 만든 것 역시 친환경을 고려한 겁니다. 크기가 작은 뚜껑까지 쉽게 수거할 수 있도록 한 거죠.
국내 생수 시장의 친환경 정책을 이끄는 건 '무라벨'입니다. 라벨을 없애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인다는 거죠. 좋은 방안이긴 하지만, 효과는 생수 페트의 무게를 줄이는 것만 못합니다. 무라벨 제품의 플라스틱 사용 감축 효과를 말하는 기업들은 연 수십~수백톤의 플라스틱을 줄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전체 사용량의 3~8% 안팎이라는 설명입니다. 20g짜리 생수 페트가 9g이 되면 플라스틱 사용량이 50% 넘게 줄어듭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둘 다'겠죠.
일각에서는 국내 업체들이 무라벨 제품 출시에 집중하는 걸 일종의 마케팅으로 보기도 합니다. 페트 무게를 줄이는 건 소비자들이 인지하기 어렵습니다. 너무 쉽게 찌그러져 먹기 불편하다는 불만도 나옵니다. 무라벨 제품은 시각적으로 기존 제품과 확연히 차이가 있어 '친환경' 이미지를 부여하기 좋죠. 내실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포장에 집중한 것 아니냐는 비판입니다.
이유는 있다
물론 국내 생수 제조사들도 할 말은 있습니다. 우선 잘 보이지 않지만 주요 제조사들은 꾸준히 페트 무게를 줄여나가고 있습니다. 생수 브랜드 '아이시스'를 만드는 롯데칠성은 꾸준히 플라스틱 용기 경량화를 진행 중입니다. 처음 출시될 때 22g이었던 아이시스 500㎖는 현재 11.6g으로 절반 가까이 가벼워졌습니다. 동원F&B의 동원샘물도 500㎖ 기준 11.8g으로 경량화에 성공했습니다. 나름의 노력을 이어가고 있는 겁니다.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제과 시장에서는 '악의 축'처럼 느껴지는 질소가 주인공인데요. 경량화한 '얇은 페트'는 외부에서의 압력에 취약합니다. 많은 양을 적재해 이동할 때 터지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생수 페트에 질소 충전을 허용합니다. 생수와 함께 넣는 질소는 페트 내부의 압력을 높여 페트가 얇아도 단단한 상태를 유지해 줍니다. 질소를 충전해 빵빵해진 감자칩 봉지를 생각하면 되겠죠.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질소를 충전한 생수를 판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유럽처럼 8~9g짜리 얇은 생수 페트를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 한 생수 제조사 관계자는 "질소 충전 없이 생수의 하중을 견디게 하려면 10g 미만으로 개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호모 플라스티쿠스'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미래인이 현생 인류를 평가할 때 플라스틱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란 의미를 담은 말입니다. 이런 오명을 벗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탈 플라스틱'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우리나라에서도 한 손으로 찌그러뜨릴 수 있는 가벼운 페트를 만나볼 수 있길 바라 봅니다.
김아름 (armijjang@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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