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난 당신을 몰라요
영화 ‘스타워즈’에서 광선검을 휘두르던 소녀(데이즈 리들리)가 어느덧 이마선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는 무표정한 여인, 프랜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주 익숙한데 무척 낯설어진 그 모습에 내 마음이 출렁였어요. 그녀의 얼굴에도 시간의 흔적이 새겨지고 있다는 게 참 어색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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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딱지 따먹고 구슬치기하던 동네 친구와도 하루아침에 말 한마디 안 하는 사이가 되는 것처럼, 익숙했던 존재나 일상도 어느 순간 아득히 낯설고 어색한 것이 되고 말기도 하잖아요. 세상이 굴러가는 속도와 내가 따라가는 속도가 맞지 않고, 내가 느끼는 세계와 실제의 세계가 한참 어긋났다는 자각이 들 때, 그 어색하고 어찌할 줄 모르겠는 감정을 프랜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아서 침을 꼴깍 삼키며 영화를 지켜보게 되었어요. 내가 어쩌다 이런 외진 도시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 아름다운 출퇴근 길을 생기 없이 걸어가는 프랜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생뚱맞은 느낌으로 어색하기만 했던 언젠가의 나를, 또 지금의 나를 닮아 있어요.ᅠ
우아한 사슴이 이른 새벽에 집 근처에 나타나곤 하는 동네, 어디서든 바다가 보이고, 새들이 사람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곳. 어디를 가도 번잡하지 않지만 안정적인 일자리와 친절한 동료들이 있는 도시에 프랜은 살고 있어요. 저런 곳이 정말 존재할까, 어쩌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동네인지도 몰라, 프랜은 좀 우울해 보이지만 아주 운이 좋군, 생각했지요. 그런데 찾아보니, 실제로 존재하는 도시더군요. 그 미국 오리건주의 항구도시 애스토리아.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이 동네와 꾸역꾸역 살아내는 일상도 누군가의 눈에는, 멋지게 보이는 구석이 있을 거라는 걸 알아요. 도무지 인정하기 어렵지만요. 어쩌다 내 모습과 목소리가 담긴 영상을 보면 못 견디게 낯설고 어색해서 못 견디겠는 그럼 심정 있잖아요. 내가 느끼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자각이 들고, 그 간극을 받아들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냥 뿅 하고 사라져버리고 싶어지죠. 프랜이 문득문득 자신이 죽은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르죠.
프랜의 자리에선 언제나 등진 모습만 보이는 동료 캐롤이 정년을 맞아 퇴임을 한다고 사무실이 떠들썩했어요. 직원들이 돌려가며 작별의 카드를 함께 쓰고 케이크를 나누며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죠. 그런데 캐롤에겐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리울 거라는 그 흔한 말도 도무지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죠. 뚱한 표정으로 문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 도망치듯이 자리로 돌아간 프랜은 퇴근해 혼자가 되어서야 자기 몫의 케이크를 짓이기며 어둠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가 또 죽음을 생각하죠.
마치 좀비처럼 같은 길을 같은 모습으로 오가던 프랜의 얼굴에 표정이 깃들기 시작한 건, 로버트가 나타나면서부터예요. 캐롤이 남긴 자리에 새 직원으로 온 그는 첫 회의 자리에서 인상 깊은 자기소개를 했죠. “타이음식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고… 어색한 침묵도 좋아해요.” ‘어색한 침묵'이라는 말이 프랜을 미소 짓게 했어요. 어색한 침묵이야말로 프랜이 살고 있는 세계니까요.
그때부터 모든 신경이 로버트에게 쏠리기 시작하는 프랜. 책상 위 조그만 스탠드를 켜고 모니터에 불이 켜지면 바로 옆에 동료와도 이메일과 채팅으로만 소통하던 프랜에게 출력한 문서를 들고 다가와 말을 건네는 로버트는 새로운 빛이었어요. 왜인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프랜은 자꾸만 로버트와 함께 있고 싶었어요. 함께 영화관에 가고, 아직 이삿짐이 정리되지 않은 그의 집에도 가고, 주말에는 마을 주민들의 파티에도 함께 갔죠. 파티에 갔던 날 밤에는 연극 게임이 펼쳐졌고, 프랜은 그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꽁꽁 감춰왔던 자기를 드러내게 되었어요. “정말 대단해요. 대체 어디서 그런 대사가 나왔어요?” 로버트가 감탄하며 프랜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쏟아냈어요. 무얼 좋아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사랑을 해봤는지 로버트는 프랜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았어요. 하지만 프랜은 그런 건 말하고 싶지가 않아요. 어디서 자랐는지, 가족관계는 어떤지, 어떻게 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말해야 하는 걸 싫어해요. “당신을 알아가고 싶은데 계속 철벽을 치니 헷갈려요. 날 좋아하긴 해요?” 로버트가 참지 못하고 따져 물었을 때 프랜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죠. “참 피곤하게 구네요. 그러니까 이혼했지.”ᅠ
남은 주말 하루는 바닥에 누운 채로, 프랜은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아침의 햇살이 점점 강해지더니 저녁 어스름에 힘을 잃어가요.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이따금 번쩍이는 모습까지, 영화는 상처 입고 드러누운 프랜의 몸 위로 하루라는 시간의 다양한 빛이 지나가는 걸 길게 비춰줘요. 책상 위 작은 스탠드와 모니터의 빛 안에서만 안전함을 느끼던 프랜의 삶에 세상의 모든 빛이 고루 뿌려지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쏟아졌다 스러지는 다양한 빛에 무방비한 채로 널브러져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죽어 있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는 장면에선 그 어떤 조명도 괜찮았지만 살아 있는 프랜에겐 세상의 모든 빛이 따가웠던 거예요.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해선 갖가지 장면을 상상해서 표현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현재 무엇을 좋아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래서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이 그토록 힘겹다는 걸,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요.
영화의 끝에서 프랜이 로버트에게 이렇게 묻는 대목이 있어요. “나를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프랜이 온 힘을 다해 했던 이 한 마디 질문이 잊히질 않아서 여기까지 쓰게 되었어요. 살아온 내내 만나온 모든 이들에게 나 또한 마음 속으로 품었던 질문이에요. 부모님께, 나를 갖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친구와 연인에게,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까? 동료나 상사에게, 혹시 내가 여기 존재하지 않던 때가 더 좋았나요? (거꾸로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정말 멍청한 말이라고 쏘아줬을 것 같네요. 그러나 결코 내 머릿속에서 멈춰지지 않는 질문이에요.)
함께 있고 싶긴 하지만, 나에 대해 알면 알수록 실망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그래서 관심 갖고 좋아하고 기대하는 세상의 빛을 피하려는 프랜을, 꼭 안아주고 싶었어요. 로버트가 그랬던 것처럼요. 로버트는 간단히 답해주었어요. ‘난 당신을 몰라요.”
자명한 건 프랜의 환상 속에서처럼 언젠가 느닷없이 죽음의 순간이 온다는 것일 뿐. 우린 그저 함께하는 순간의 좋은 감정들을 끊임없이 만들며 누리는 것이 최선일지 몰라요. 어색하고 낯설지만, 화면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맥락 없는 답변을 듣고, 그리고 잊어버리고 싶어요. 등진 모습이 더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다가가 위로가 되지 않는 아무 말이라도 건네고 싶어요. 프랜이 월요일 아침에 도넛 가게에서 우연히 마주친 캐롤에게 다가가 그랬던 것처럼요.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를 보고 난 내 마음이 그랬어요.
영화 칼럼니스트 이하영 ha02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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