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도시’ 구로서 정의당 새 출발…“사라지지 않아”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지, 지난 100일은 끊임없이 방향을 잡아나가는 시간이었다.”
지난 20일 찾은 서울 구로구 정의당의 새 당사, ‘다시 시작’이라고 적힌 노란색 펼침막 앞에 선 권영국 대표가 말했다. 정의당은 아파트형 공장, 중소기업 사무실 등이 모여있는 이 건물 10층에 80평(265㎡) 짜리 사무실을 얻어 지난달 27일 이사를 했다. 4·10 총선 참패로 국회 밖으로 밀려난 뒤 얻은 새 보금자리다. 새 당사는 아직 현판을 달지 못해 밖에서 보면 일반 사무실과 다르지 않다. 서울시당과 ‘비상구’(비정규노동상담창구)의 입주를 기다리는 사무실 한편이 어수선했다.
다음달 4일, 정의당이 광야에서 선 지 100일을 맞는다. 심상정 전 대표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현장이자, 노회찬 전 의원이 언급한 ‘6411 버스’ 노선이 지나는 구로에서 ‘다시 시작’을 선언한 정의당은 진보정당이 다시 서야 할 곳, 나아갈 길을 찾고 있었다.
권영국 대표와 문정은·엄정애 부대표, 나순자 사무총장, 이은주 정무실장(전 의원) 등 8기 지도부는 지난 5월29일 임기 시작과 함께 100일간 전국을 돌았다. 직접 찾은 투쟁 현장만 65곳. 충남 서산·태안을 시작으로 시·도당 19곳도 찾았다. 국가보조금은 ‘제로(0)’가 됐고 30억원 가량의 부채가 발목을 잡다 보니 지역으로 내려가는 교부금이 줄었고 지역 조직은 한층 더 취약해져 있었다. “사무실을 크기를 줄이고 다른 당과 공간을 함께 쓰거나 반상근자를 둔 지역도 많았다. 당원들도 ‘정의당이 아직 있어요?’라는 질문을 주변에서 들어가며 지금 시기를 견디고 있었다.”(권영국 대표)
새 지도부가 꼽은 ‘원외정당 전락’의 원인은 △원내 안주 △현장성 부재다. 지난 21대 국회를 돌아보면, 몇몇 의원들의 활동이 과잉 대표되면서 특정 이슈에 치우친 정당으로 외부에 비쳤고, 이 과정에서 전통 지지층인 40·50대 노동자들이 이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상정 이후’를 상징할 대선주자급 인물 부재로 세대교체에 실패한 점, 야권 지지층 안에서 ‘2022년 대선 패배 책임론’의 잔영이 사라지지 않은 점 등도 요인으로 꼽힌다. 기대 수준이 낮아진 탓인지 현장에선 ‘정의당이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조차 시간이 갈수록 시들해졌다.
“제가 ‘거리의 변호사’로 활동할 때 정의당에서 누군가 현장에 오면 ‘사진만 찍고 가려고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는 제가 그 요구를 듣고 실천해야 할 입장이 됐다.” 권 대표가 씁쓸하게 웃었다. 기술직 해고 노동자 출신인 권 대표는 쌍용차 정리해고, 구의역 김군 사망사건, 고 김용균 사망사건 등 노동 현안을 다루는 ‘인권 변호사’로 활동해왔다.
하지만 당 한편에선 이러한 지도부의 진단이 핵심을 짚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정당정치의 ‘방법’에 대한 고민에 매몰돼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게 추락의 근본 원인이란 얘기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어 처음 국회에 진출한 뒤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며 21대 국회(~2024년)까지 원내에서 생존해온 진보정당이 정의당의 ‘원외 퇴출’과 함께 ‘1막’이 내렸다는 평가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한번 진보정당이라고 영원히 진보정당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 유권자들의 이념지형도 변하는데, 정의당이 2024년 진보가 무엇인지, 정책·노선을 갱신하지 못하다 보니 유권자들과의 주파수를 잃은 것 같다. 노동 문제만 하더라도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주장했던 과거와 다르게 지금 비정규직은 매우 분절화돼있다. 무상급식, 무상교육처럼 이런 시대 변화에 맞는 새로운 의제를 제시해야 했다.”(서복경 더 가능연구소 대표)
정의당은 이러한 진단에 대한 해법도 “현장에서 찾겠다”는 생각이다. 권영국 지도부의 첫 일정도 5월29일 부산 한국남부발전 본사 앞에서 열린 ‘정의로운 전환 발전노동자 행진’이었다. 2036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 28기를 폐쇄하겠다는 정부 발표 뒤 고용 불안을 겪는 발전에이치피에스(HPS) 노동자들의 상황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기후위기에 따른 에너지 전환 요구와 발전 노동자들의 일자리 위기가 교차하는 ‘복합 위기’의 현장을 방문해, 노동·기후·차별 현안에 주도적으로 목소리 내겠다는 새 지도부의 다짐을 재확인하자는 취지이기도 했다.
파리바게트 제빵기사 불법파견 문제를 주도적으로 이슈화한 ‘비상구(비정규직노동상담창구)’ 사업도 다음달 12일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노동당·녹색당과의 연대도 모색하고 있다. 2026년 지방선거 일정에 맞춰 주요 정책 공약을 발표할 계획이다.
물론 정의당의 재건에 물음표를 띄우는 이들도 있다. 21대 총선을 거치며 당이 떠안은 부채 역시 정당으로서 ‘지속가능성’에 회의적 시선을 키운다. 지난 21대 총선 때 지역구 출마자 선거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받은 대출금 40억여원 가운데 아직도 30억원 정도를 갚지 못했다. 그 여파로 40~50여명이었던 당직자 규모를 5분의1 수준인 11명으로 축소했다. 이들은 삭감된 임금을 감내하며 당사를 지키고 있다. 한때 8만여명에 달하던 당원은 4만5천여명으로 줄었다. 당 관계자는 “전반적으로 당의 활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고 했다.
조국혁신당과 진보당이 정의당을 대체할 거라는 시각과도 싸워야 한다. 권영국 대표는 “정의당을 대체할 정당은 아직 없다”고 강조한다. ‘검찰독재 조기 종식과 ‘사회권 선진국’을 내거는 조국혁신당은 “사회권 문제는 늘 투쟁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그러한 실천 방안이 없는 주장이라 허전”하고, 민주당 주도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해 원내에 진입한 진보당은 “‘민주당이 허락한 진보’에서 벗어나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정의당은 지난 26일 구로구 당사 개소식을 열었다. 사무실 입구에 단 현수막의 문구는 ‘노동의 희망 시민의 꿈 정의당.’ 양경규·이은주·장혜영 등 정의당 전 의원단과 김세균·김준우·김찬휘·나경채 등 전 대표단, 권영길·단병호·최순영·현애자 전 의원 등 민주노동당 ‘원년 멤버’를 비롯해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힘내라 정의당”이란 문구로 조합한 글자판을 함께 들어올리며 마지막 단체 사진을 찍었다.
권 대표는 한겨레에 “여전히 정의당을 필요로하는 지역과 현장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여러 오류와 과오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관심과 애정의 끈을 놓지 말아달라.”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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