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풍 깃든 '창신동 문구거리'의 복잡한 갈림길 [추적+]
침체늪 빠진 창신동 문구거리
빈 점포 채운 건 日 캐릭터 매장
20대 여성ㆍ외국인 많이 방문해
문구거리 새로운 바람 불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긍정적인가도 따져야
자칫 거리 정체성 잃을 수도 있어
문구거리 특색 유지에 힘 쏟아야
주변 관광지와 연계책 필요해
침체의 늪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창신동 문구완구거리. 최근 이곳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일본 캐릭터 매장들이 '빈 가게'에 둥지를 틀면서다. 한편에선 '요즘 같은 침체기에 빈 점포가 사라지는 게 어디냐'고 말하지만, 장기적으로 이게 긍정적인 방향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자칫 창신동 문구완구거리가 '정체성'을 잃을 수도 있어서다.
골목을 따라 촘촘히 자리잡은 문구ㆍ완구 가게들. 매장 천장까지 쌓인 장난감 상자들과 인형, 색색의 문구류들. 지하철 1ㆍ6호선 동묘앞역 6번 출구에서 나와 골목으로 들어가면 어렸을 적 한번쯤 꿈꿨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에는 120여개(창신동 문구완구거리 상인회 추정)의 문구완구 도소매 매장이 둥지를 틀고 있는데, 시중가의 20~30% 할인된 가격으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주말 방문객은 7000~2만명으로 추정된다.
창신동 문구완구거리는 1960년대 동대문역 앞에서 상인들이 문구 장사를 하면서 시작됐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지금 자리에 하나둘씩 정착하면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 쇼핑몰이 세력을 넓히고 팬데믹까지 휘몰아친 이후엔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 탓에 '시중보다 물건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다'는 강점마저 사라졌으니, 지금은 돌파구를 찾는 것도 어렵다. 이 거리에서 21년째 도소매 문구점을 운영하고 있는 조치현(52)씨는 코로나19 때 매출이 반으로 줄었고, 지금은 거기서 반이 더 쪼그라들었다"며 한탄했다.
창신동 문구완구거리가 힘을 잃은 이유는 또 있다. 저출생 위기가 심각해지며 문구완구거리에서 물건을 구입하던 문구점들(소매상)이 해마다 500곳 이상 폐업하고 있는 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 문구점은 2012년 1만4731개에서 2019년 9468개로 줄어들었다. 한국문구유통협동조합이 지난 3월 발표한 전국문구점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올해 1월 기준 전국 문구점의 수는 7800여개로 더 감소했다.
그렇게 '비어가는' 창신동 문구완구거리를 채우고 있는 건 공교롭게도 일본 캐릭터 매장이다. 이들은 완구ㆍ문구류를 파는 기존 전통적인 가게와는 달리 산리오(Sanrio) 등 일본 캐릭터 제품들을 수입해 판매한다. 6개월 전 이곳에 수입 캐릭터 매장을 연 허임철(46)씨는 "일본에 있는 캐릭터숍인 '키디랜드'를 표방해 매장을 열었다"며 "주로 20대 여성들과 외국인들이 많이 방문한다"고 말했다.
거리의 빈 점포를 새로운 상인들이 채우고, 그 상인들이 또다른 손님을 불러모으는 건 긍정적인 변화다. 문제는 이런 흐름 속에서 '창신동 문구완구거리'가 특색을 유지할 수 있느냐댜. 캐릭터 매장이 둥지를 틀고 있더라도 창신동 문구완구거리가 홍대나 명동처럼 변하게 놔둬선 안 된다는 거다.
실제로 이곳에서 만난 외국인 관광객들은 '창신동 문구완구거리'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홍콩에서 왔다는 소피(16)양은 "동대문으로 여행처를 정하면서 근처 '한국의 가볼만한 곳'을 온라인으로 검색했더니 이곳(창신동 문구완구거리)이 나와 들렀다"면서 "너무 흥미롭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온 하난(43)씨의 얘기도 들어보자. "신당 중앙시장을 찾은 김에 근처를 걷다가 재미있는 거리를 발견해 구경하고 있었다." 하난씨의 4살, 7살 자녀는 창신동 문구완구거리에서 구매한 플라스틱 요술봉과 게임기를 들고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이 때문인지 전문가들은 '비어있는 가게'를 채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창신동 문구완구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창신동 문구완구거리 주변에 있는 동대문 평화시장, 신당 중앙시장, 청계천을 잇는 '연계책'도 고민해야 할 때란 주장도 나온다.
실제로 창신동 문구완구거리는 '종로청계관광특구'로 지정돼 있다. 종로청계관광특구는 '인장의 거리' '세운상가' '수족관 시장' '조명 시장' 등 인근의 12개 특화 상권을 묶어 관광특구로 지정한 곳이다.
다만,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 12개 거리가 '관광특구'란 이름으로 묶여 있는 탓에 거리 하나하나의 개성을 살리는 덴 한계가 있다. 정란수 한양대(관광학부) 교수는 "종로청계관광특구는 제각각의 특성을 가진 거리가 여러 개로 형성이 있기 때문에 사업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면서 "이런 이유로 창신동 문구완구거리 역시 활성화 정책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창신동 문구완구거리만의 특색과 차별화를 만들 수 있는 전략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정 교수의 말을 더 들어보자. "저렴하게 완구 등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창신동 문구완구거리에 방문하곤 있지만, 그것을 차별화한 특색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렇다고 최근 자리를 잡고 있는 일본 캐릭터 상점들이 동대문의 특색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서울시의 해치 등 국내 캐릭터를 활용해서 캐릭터 상품을 파는 매장을 만들거나, 청년들과 협업해 프라모델을 전시하는 등 창신동 문구완구거리와 결이 맞는 프로그램을 펼치는 게 중요하다."
문제는 관할 지자체가 아무런 정책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종로구청은 낡은 시설과 도로 개선, 뽀로로 조형물 설치 등만 하고 있을 뿐, 창신동 문구완구거리의 특성을 차별화하기 위한 논의조차 진행한 적 없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종로청계관광특구가 전체적으로 활력이 떨어진 것에 동의한다"며 "개개인이 영업을 하는 곳들이다 보니 함께 발맞춰 무언가를 진행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털어놨다. 이어 "올해 하반기에 창신동 문구완구거리 상인회와 간담회를 진행해 거리의 특색을 살리기 위한 방안을 함께 고심하겠다"고 덧붙였다.
골목을 다시 돌아봤다. 장난감이 가득 든 상자를 맨몸으로 옮기고, 가게 밖에 서서 손님들을 부르는 여러 상인들. 한 상인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실 이 거리에서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 이는 한 명도 없어요. 여러 이유들로 거리 자체가 경쟁력을 잃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경쟁력을 잃은 옛 상권으로 남을 것인가, 거리의 특색을 살려 한단계 진화할 것인가. 창신동 문구완구거리는 기로에 서 있다.
홍승주 더스쿠프 기자
hongsam@thescoop.co.kr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