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적 전력수급기본계획의 수립 원칙[11차 전기본 톺아보기⑤]
국가에너지계획이 실종됐다. 20년을 계획기간으로 하고 5년마다 수립하던 에너지 분야 최상위 계획이다.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2019~2040년)을 평가하고 갱신할 시점이지만, 탄소중립기본법 제정 과정에서 계획 수립 근거 조항이 유실된 까닭이다. 제4차 에너지기본계획 수립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전력수급기본계획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모양새다. 2년마다 수립하기 때문에 정부는 집권하는 동안 두 번 정도 발표하게 된다. 지난 5월 공개된 제11차 계획(2024~2038년) 실무안은 제10차 계획(2022~2036년)의 여러 문제점을 답습한다. 전력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 윤석열 정부가 밝힌 에너지 정책 방향을 법정 계획으로 재승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해당 정부의 정책 기조에 따라 전원구성과 발전비중에서 차이가 생기는 경우가 있지만, 유사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환경·기후영향평가, 탄소중립위원회 협의, 국회 상임위원회 보고, 공청회라는 절차적 과정은 전기본 수립 총괄위원회와 전력정책심의회 심의에 사실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의사결정과 거버넌스의 폐쇄성은 고질적이고, 에너지기본계획이나 탄소중립기본계획에 비해 더욱 심각하다. 결국, 전력 설비, 계통, 시장을 둘러싼 쟁점 사안에 대해 계획 합리성보다는 불합리성을 초래한다. 계획 재수립, 백지화 주장이 2년마다 전국 곳곳에서 반복되면서 사회갈등이 증폭된다.
제1차 계획(2002~2015년)이 전력산업구조개편 맥락에서 수립된 이후 전력산업의 공공성 기반이 지속적으로 잠식되는 현실은 탈탄소 에너지전환의 민영화 흐름에서 정점을 찍고 있다. 전력당국과 전문가들은 전력수급기본계획의 역할을 민간시장에 재생에너지 사업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시행된 분산에너지법을 통해 민간전력시장 활성화라는 오래된 전망도 현실이 되고 있다. 반면, 전력수급 전망을 전국 단위로만 계획에 반영하다 보니 지역별 수요와 공급 목표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광역·기초 지자체가 세우는 지역에너지계획과 정부의 전력수급기본계획과 한전의 장기송변전설비계획 사이의 불일치가 심해지고 있다.
탈탄소 에너지전환을 위해서는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난 대안적 계획이 필요하다. 기술관료적 방식에서 사회생태적 방식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관계망 분석, 미래 비전, 정의로운 에너지전환 경로 설계, 혁신 거버넌스와 공동계획 수립이라는 일련의 역동적 과정을 도입해야 한다. 이런 ‘정의로운 에너지전환을 위한 사회적 계획’을 통해 기술적 극복 과제뿐만 아니라 탈탄소·탈핵 로드맵, 지역별 재생에너지 자립, 공공재생에너지 등 대안적 정책 접근이 가능하다.
전력수요와 전력공급의 격차를 해소하려면 적극적인 수요관리 정책도 검토해야 한다. 효율성(efficiency) 정책은 중요하지만, 에너지·온실가스 총량을 관리하는 데 한계를 보인다. 오히려 개별 단위 효율 향상은 총 에너지 생산·소비 증가를 전제하는데, 늘어나는 수요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더라도 더 많은 설비가 필요하게 된다. 충족성(sufficiency)이라는 보완적 개념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충족성 정책을 ‘지구 위험한계선 내에서 인간 모두의 웰빙을 제공하면서 에너지, 물질, 토지와 물의 수요를 회피하는 일련의 수단과 일상 실천’으로 소개한다.
환경단체 유럽환경국(EEB)이 1990~2018년 유럽의 건물부문의 온실가스 배출 증감(-29%) 요인을 분석한 바 있다. 효율성(-34%)과 재생에너지(-33%) 지표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인구(6%)와 충족성(32%) 지표에서는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건물이 더 많고 더 커지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 결과, 효율성 효과가 상쇄된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등 몇몇 경우에도 효율성과 재생에너지에 더해 충족성 정책이 포함돼야 탈탄소 에너지전환 계획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최근 에너지 충족성에 대한 정책적 관심은 도넛 경제나 포스트 성장으로 연결되면서 대안 담론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전환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전력계획, 에너지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정부가 지난 5월 발표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은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에 기반한 한국의 첫 번째 전력계획이며, 2035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의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11차 전기본 실무안은 기후위기 대응 및 에너지전환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1차 전기본 실무안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에너지정책 변화를 촉구하는 릴레이 기고를 5차례에 걸쳐 내보냅니다.
이정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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