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생활 함께한 범인…텔레그램 성범죄 확인하며 구역질 났다”

박현정 기자 2024. 8. 2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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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성범죄 피해자 진술문
게티이미지뱅크

“제 얼굴이 집단 성폭력 범죄 피해 현장과 합성돼 있는 모습, 얼굴이나 생식기 부위에 성적으로 비하하는 욕설이 적혀 있는 모습 등 (불법합성 성범죄) 증거물 수십여 장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본인 사진이 맞다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구역질을 참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제 허위영상물(범죄피해물)을 수사기관과 재판부, 다른 참고인, 어쩌면 피의자와 피의자 변호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보게 될 것이라는 실감이 들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올해 봄 경찰서에서 그간 남의 일로만 여겼던 불법합성 성범죄 피해를 확인한 그 날 이후 주환경(가명)씨 일상은 “불쑥불쑥 분노와 슬픔,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할” 만큼 휘청였다. 또다른 피해자가 2021년 7월 처음 경찰 신고를 한 지 약 3년 만인 올해 5월 붙잡힌 범인 중 1명은 주씨와 학교 생활을 같이 한 대학 동문이었다. 그렇기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게 됐을 때 더 큰 충격을 받았고, 인간관계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는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 가해자들은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져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1심이 진행 중이다.

학교나 지역별로 불법합성 성범죄물을 공유하고 있던 텔레그램 방의 모습들. 텔레그램 갈무리

주씨는 지난 14일 가해자들에 대한 재판을 하고 있는 법정에 나가 피해자로서 의견을 진술했다. 법정에 오기 어려운 피해자부터 이 사건을 잊고 살길 원하는 피해자까지 다수의 피해자를 대신해 범죄 피해로 인한 고통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직접 판사의 얼굴을 보며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간 느꼈던 고통과 슬픔, 처참한 심경을 200자 원고지 약 40매, 8천자가 넘는 글자에 꾹꾹 눌러 담았다. 한겨레는 28일 피해자와 논의를 거쳐 그가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 일부를 추려 보도하기로 했다. 자신의 피해 경험을 언론을 통해 드러내기로 한 까닭에 대해 주씨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를 둘러싼 인터넷 반응 중에는 ‘이런 범죄가 왜 큰 상처가 되는지 모르겠다’, ‘몇몇이 자기들끼리 만들어 돌려본 거면 피해가 미미한 거 아닌가’ 같은 말이 있었다. 집단적으로 피해자를 모욕하는 불법합성물 성범죄는 피해자 일상과 인격을 훼손하지만, 그 피해를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어린 학생들이 이런 피해를 입고, 가해 행위에 가담한다는 데 대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조금이라도 나설 형편이 되는 내가 피해 경험을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피해자 주환경(가명)씨 의견 진술 주요 내용

오늘 이렇게 피해자 진술을 할 기회를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안이 민감하고 사회적 시선도 모으고 있는 이 사건에서 과연 법정에 출석해 진술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너무나 큰 괴로움을 경험했고, 현재도 피해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과연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저의 피해 사실과 이 사건에 관한 의견을 간결히 정리하여 말씀 올릴 수 있을지 고민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 재판 과정에서 보인 피고인들의 태도에 인간적으로 실망을 금할 길이 없고, 나아가 이 사건의 수많은 피해자들 중 누군가의 목소리는 재판부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 오늘 의견진술 기회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피고인과 학교에서 알게 된 사이입니다.강의는 물론 학생 식당에서의 식사, 과제와 스터디 등 학교 생활의 거의 모든 국면에 피고인을 포함한 이들을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 되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이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 더욱 큰 충격을 받았고, 인간관계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는 타격을 받았습니다.

지난 봄 경찰청에서 이 사건에 관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피의자가 제 사진을 이용해 허위영상물을 제작·반포했을 뿐 아니라, 다른 범인에게 저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소상한 정보를 제공한 정황이 있으니 검거에 도움을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경찰에 출석하기까지 며칠간 전혀 잠을 자지 못했는데, 막상 수사 자료를 확인하고 나니 누가 따귀를 때린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 얼굴이 나체의 임신부나 집단 성폭력 범죄 피해 현장과 합성돼 있는 모습, 얼굴이나 생식기 부위나 엉덩이에 성적으로 비하하는 욕설이 적혀 있는 모습, 흰자가 보이도록 눈알이 뒤집힌 기괴한 표정으로 가공돼 있는 모습의 증거물 수십여 장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본인 사진이 맞다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구역질을 참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제가 아닌 다른 피해자 사진이 섞여 들어간 것도 있었는데, 아는 사람의 사진이기 때문에 더 괴로웠습니다. 제 허위영상물을 수사기관과 재판부, 다른 참고인, 어쩌면 피의자와 피의자 변호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보게 될 것이라는 실감이 들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텔레그램 대화방 참가자들은 마치 오래 안 친구처럼 저를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 공간에서 제가 희롱의 대상이 된 것이 하루이틀 일이 아니겠구나 싶었습니다. 피고인들은 제 사진을 공유하며 신체를 평가하거나 성범죄를 저지르고 싶다고 하거나, 개인정보를 유포하거나 전화번호를 공유하며 장난전화를 걸어 그 통화 녹음본을 성적 목적으로 사용하자고 공모하기도 했습니다.경찰에서 보여주신 자료에는 제 사진을 띄운 화면에 누군가가 자위하는 영상도 있었습니다. 조사를 받고 나서 며칠간 학창 시절 찍은 모든 사진을 일일이 확인하며 누가 범인일지 괴로워하고, 지인들을 의심하며 잠도 자지 못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저는 애써 사건에 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불쑥불쑥 분노와 슬픔,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정상적인 일상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저에 대해 저속한 발언을 하거나, 그런 사실이 없는데도 마치 본인과 제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렸습니다. 이런 대화 내용을 보며 성적 수치심도 느꼈지만 극심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들은 공소사실을 대체로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 입장에서 본 피고인들의 태도는 실망스럽기 그지없고, 공소장 기재 범죄사실의 행위자가 본인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인정하는 것 외에 과연 본인들이 어떠한 짓을 한 것인지, 본인들 행위의 도덕적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피고인들이 작성한 반성문과 사과문을 읽어 보았으나 진심 어린 반성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피고인들은 정신질환 때문에, 좌절된 꿈 때문에, 분출구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변명합니다.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행위를 애써 분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피고인들은 본인들이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다만 회피하고 있을 뿐입니다. 피고인들은 대화방에서 저를 비롯한 피해자들을 여러 번 여성 성기의 속칭으로 호명하면서,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 봤자 결국 저희는 여성기에 불과하다고 조롱하였습니다. 이러한 피고인들의 발언이 이 사건 범죄 사실의 동기이고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본인들의 생각이 역설적으로 피고인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 그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떳떳하게 살아갈 것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고민하지 못하는 피고인들이,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한 자신이 얼마나 큰 절망과 공포를 느끼는지에 관해서만 수십장의 반성문을 제출한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들에게는 티끌만큼의 위로도 될 수 없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수십 명의 피해자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모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다른 피해자들과 활동가들의 오랜 노력으로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더라면, 저를 비롯한 여러 피해자들은 범죄 행위의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피고인들과 웃는 낯으로 교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합니다. 나아가, 디지털범죄 특성상 완전한 피해 회복이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하며 피해자들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범죄 사실이 있는 것은 아닌지, 피해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지는 않을지 피해 사실이 언론에 보도돼 자신이 특정되지는 않을지, 피고인들이 제작하고 반포한 저질스러운 허위영상물이 확산돼 추가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을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언제가 되어야 피해가 회복되고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의 상황을 부디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분투해 온 수십 명의 피해자들의 노력이 조금이라도 보답 받을 수 있도록 법의 엄중함을 보여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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