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정 칼럼] 응급실을 너무 만만하게 본다

황수정 2024. 8. 28. 05: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엄친아 전공의’들의 지리멸렬
청년 무기력, 사회적 의제 던져
응급실 한번 찾아가지도 않고
아직도 정부는 “검토, 검토”만…

논리적으로 따지는 상대는 대응하기 수월하다. 다 싫다며 도리질만 치는 상대는 난감하다. 7개월째 의료대란에서 전공의들은 ‘무대응이 대응’이었다. 의료 현장의 핵심 인력인 20~30대 전공의들이 누군가. 수학능력시험에 최적화됐던 ‘1% 엄친아’들이다.

그런 전공의들의 공개적으로 반듯한 목소리를 지금껏 들어 보지 못했다. 정부가 어떤 단계에서 무슨 카드를 어찌 꺼내든 대응은 한 가지. ‘의대 증원 원점 재검토’였다. 어느 쪽으로든 국면을 바꿀 협상의 여지 자체를 준 적이 없다.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은 요양병원, 동네 의원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자신들의 주장을 조직화해 관철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보여 준 적이 없다.

나는 ‘엄친아 전공의’들의 지리멸렬이 서글프다. 의료개혁의 당위와는 별개의 얘기다. 정면돌파로 사회적 동의를 구하려 세력화를 시도하지도 못하는 최고 엘리트들. 그 무기력이 서글프다. 의대 재학생들의 대책 없는 침묵 행렬은 말할 것도 없다. 의대생의 부모들이 교육 정상화를 요구하며 공휴일에 집회를 대신 열어 줬다. 부끄러운 풍경이다. 의대생들이 몽땅 유급을 불사하겠다는 초유의 사태.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자신들 목소리를 스스로 공론화할 줄 모른다.

우리 엘리트 교육의 심각해진 구멍을 목도했다. 필수의료 부족만 문제가 아니었다. 1% 엄친아 청년들의 허약함은 국가 차원의 문제였다. 깊이 돌아볼 사회적 의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의대 증원이 이 지경까지 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화물연대도 업무개시 명령이 통했고 민주노총도 회계장부를 내놨다. 무대응이 대응인 상대를 만나 협상 자체가 불가능했던 그간의 사정은 정부를 위한 변명일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응급실이 위태로워진 현실을 대하는 정부 태도는 변명이 어렵다. 응급실 뺑뺑이를 돌았다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의료체계가 무너진다면 정권 자체도 유지하기 힘들다”고 했다. 시중 분위기와 딴판인 얘기가 아니다. 의료개혁에 동의했던 사람들도 위기를 느낀다. 연쇄적 의료 차질에 일상이 깨지려는 현실은 공포다. 전국 408개 응급실 중 24곳이 병상을 축소했다는 통계에 정부는 “파행은 5곳뿐”이라고 했다. 응급실이 5곳만 비정상 운영된다 한들 그게 적은가. 야간에 심정지 환자 말고는 신규 환자를 못 받는다는 응급실이 서울에서도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정부가 추진 중인 의료개혁 과제를 설명하겠다고 한다. 더 내놓을 카드는 사실상 없다. 정말 답답한 것은 지금껏 바꿔 놓은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암 수술 등 보상 수준이 낮은 1000여개 중증 수술의 수가를 올리는 방안을 정부는 아직도 ‘검토 중’이다. 인터넷 공간의 댓글만 훑어봐도 정부의 굼뜬 대응에 답답해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의료개혁에 동의했던 이들도 “그걸 아직도 안 했냐”고 반문한다. 반년 넘게 의료대란을 감수하게 했으면 아무리 복잡한 작업이었어도 지금쯤 구체적 얼개를 내놔야 한다. 의사들의 반대 명분이 없어지도록 맨 먼저 서둘렀어야 할 작업이 필수의료 수가의 파격적 조정이었다.

필수진료과 수가 인상에 매년 2조원씩 5년간 10조원을 들이겠다고 발표한 것이 지난 2월이다. 내후년부터 건보재정은 적자로 돌아선다. 해마다 2조원을 어떻게 마련할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정부를 못 믿겠다는 의사들 불만이 자꾸 더 크게 귀에 들어올 수밖에 없어진다. 남아도는 지방교육교부금을 건보재정으로만 돌려도 한숨 돌릴 여지는 생긴다. 정부도, 국회도, 대통령실조차도 이런 해법조차 꺼내는 노력을 보여 주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에 지방 의대의 교수들이 수도권으로 옮기고 있다. 의대 정원 급증에 교수인력 보강 대책이 난망해 보이니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엑소더스’하는 셈이다.

어느 정권도 건드리지 못한 의료개혁은 국민적 동의만이 동력이다. 의료 파행의 위협을 7개월째 감수했는데 달라진 게 없다는 불신이 더 커지면 백약이 무효한 순간이 온다. 지금이 그 경계선이다. “응급실 뺑뺑이는 원래 있었다.” 이런 대응이 더 들린다면 국민은 돌아선다. 누구의 말처럼 응급실이 정권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황수정 수석논설위원

황수정 수석논설위원

Copyright © 서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