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디 머큐리의 그 옷… 우아하고 클래식하게 돌아온 러닝셔츠
러닝셔츠 컬렉션에 선보인 루이비통
이번 시즌 런웨이 장악하며 반전 매력
MZ세대 셀럽도 러닝셔츠 열풍 가세
대개 러닝셔츠는 면사나 모사 혼방으로 만든 소매 없는 운동용 셔츠를 뜻한다. 촉감이 부드럽고 땀 흡수가 잘돼 오랜 시간 남성들의 속옷 대용으로 사용돼 왔다. 그렇게 신사들의 바스트 포인트를 가리는 역할을 충실히 해내며 화이트 셔츠를 묵묵히 떠받들어 온 러닝셔츠가 이번 시즌 런웨이를 맹렬한 기세로 장악하며 누구도 예상 못 한 반전을 선사하고 있다.
만년 조연 자리에 머물던 러닝셔츠가 주연 자리를 꿰찬 것은 그닥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러닝셔츠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몇몇 역사적인 순간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영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퀸의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의 패션을 떠올려 보자. 그가 무대에서 즐겨 입었던 흰색 러닝셔츠와 미끈하게 빠진 랭글러 진 그리고 아디다스 운동화까지. 소위 ‘난닝구’ 차림으로 무대를 휘젓던 그의 모습에서 젊은이들은 엄숙했던 1980년대 당시 영국의 사회 분위기에 온몸으로 맞서는 희열을 맛봤으리라.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러닝셔츠가 톱스타들의 영예로운 순간을 기억하는 상징물이 된 예는 또 있다. 바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다. 정전이라도 된 듯 암흑 같은 블랙 룩 차림의 그가 ‘빌리진(Billie Jean)’을 부르며 무대에 등장할 때, 현란한 춤사위보다 눈을 사로잡은 건 스포트라이트를 켠 듯 대비되던 새하얗게 빛나는 러닝셔츠였다. 남성의 것도 여성의 것도 아닌 중성적인 러닝셔츠 차림의 그는 패션계에 유니섹스 열풍을 일으켰다. 그의 음악만큼이나 앞서간 패션 감각은 지금도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가수 나훈아는 또 어떤가. 흰색 러닝셔츠에 체인 네크리스를 휘감은, 곱슬곱슬한 펌 헤어의 반항기 어린 스물셋 청년과 프레디 머큐리를 두고 누가 난닝구 패션의 원조인가를 따지는 설전이 오가기도 했다. 나훈아가 데뷔 55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흰색 민소매 차림으로 나타나 ‘테스형’을 부르며 건재함을 과시한 무대는 시간이 흘러도 레전드로 회자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러닝셔츠가 남성의 언더웨어가 아닌 ‘옷’으로 인정받은 역사적 순간이다.
이토록 찬란한 역사를 가진 러닝셔츠가 이번 시즌에는 더욱 우아하고 클래식한 무드로 돌아왔다. 러닝셔츠 위에 시스루 셔츠를 껴입고 시작된 에르메스의 고매한 슈트는 시작에 불과할 정도. 화이트 러닝셔츠를 컬렉션 전면에 내세운 루이비통의 드레시한 슈트들은 당장이라도 출퇴근길에 시도하고 싶게 만들었다. 에르메네질도 제냐 역시 흰색 슬리브리스 톱과 바삭거리는 질감의 재킷과 쇼츠를 한 벌로 연출한 다양한 피스들로 너무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 비즈니스 캐주얼 룩을 연출했다. ‘마라톤’을 콘셉트로 한 웨일스 보너는 울 베스트와 블레이저 재킷 등 묵직한 테일러링에 러닝셔츠와 쇼츠 같은 스포티 아이템을 믹스 매치하는 천연덕스러움으로 눈을 즐겁게 했다.
그런가 하면 셔츠를 벗어 던진 채 러닝셔츠 차림으로 런웨이에 나선 파격적인 지방시의 모델들도 있다. 하의로는 여유로운 미디엄 팬츠를 택하고 벨트 백과 양말, 로퍼 등의 액세서리를 곁들여 하우스만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냈다. JW앤더슨은 살결이 비치는 얇은 러닝셔츠에 V자로 깊이 파인 스웨트 셔츠와 팬츠 세트 차림으로 우아함과 편안함이 깃든 룩을 연출했다. 유니섹스 스타일에 기저를 둔 루도빅 드 생 세르냉은 민소매 톱과 시어한 셔츠, 치골이 반쯤 드러나는 가죽 스트랩 팬츠를 조화롭게 매치해 성 고정관념을 깨뜨리기도 했다.
런웨이에 불어온 러닝셔츠 열풍에 MZ세대도 가세했다. 몸에 딱 맞는 블랙 슈트 차림으로 나타난 배우 차은우는 화이트 셔츠 대신 슬리브리스 톱을 선택해 절제된 섹시미를 드러냈다. 배우 이종원과 음악 프로듀서 코드 쿤스트의 스타일링에서는 자유로움과 편안한 멋이 공존한다. 러닝셔츠를 데님 팬츠 안에 집어넣고 벨트로 허리춤을 끌어올린 뒤 얇은 셔츠를 더하는 식. 민소매 노출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룩이다.
이 외에 슬리브리스 톱에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카고 팬츠와 비니, 진주 장식 초커를 매치해 스타일의 화룡점정을 찍은 래퍼 우원재와 물 빠진 데님 셋업에 러닝셔츠를 매치한 세븐틴 호시, 평소 다채로운 컬러의 민소매 톱에 데님 진과 스니커즈로 러닝셔츠 사랑을 몸소 실천 중인 라이즈 원빈까지 Y2K에 심취한 세대답게 복고적이고 어딘지 반항적이기까지 한 개성 있는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러닝셔츠의 재발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런웨이와 리얼웨이를 막론하고 슬리브리스 톱이 포착되는 지금, 옷장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러닝셔츠가 있다면 과감히 꺼내어 대열에 합류해볼 때다.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이 가기 전에 말이다.
안미은 패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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