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치료 졸업했어요, 이젠 펜 잡으면 숨 쉬어져요

황지윤 기자 2024. 8. 28.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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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영원한 천국’ 3년 만에 신작 낸 정유정

소설가 정유정(58)은 지난 열흘간 신작 장편소설 ‘영원한 천국’(은행나무) 초판 한정 5000부에 친필 사인을 했다. 매일 운동하듯 500부씩, 소설에 등장하는 앵무새까지 깜찍하게 그려 넣었다. 팔이 뻐근해질 법한 분량이지만, 끄떡없었다. 매일 유산소와 무산소 운동을 각각 한 시간씩 하는 소설가에게는 가뿐한 일일까. 초판만 7만5000부를 찍고, 닷새간 언론사 열세 곳과 릴레이 인터뷰가 잡힌 스타 작가의 단단히 다져진 내공인지도 모른다.

몇 년에 한 번, 장편소설을 발표할 때만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정유정은 "책 하나 내고 나면 나이를 두세 살씩 꼬박꼬박 먹는다. 스카이콩콩 타고 인생을 콩콩 뛰어다니는 기분"이라며 "매번 당 충전하는 마음으로 독자를 만난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2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만난 정유정은 트레이드마크였던 짧은 머리를 어깨 아래까지 길렀다. 변화가 감지됐다. 과거 암 진단을 받은 소설가는 재작년 말 10년간의 추적 검사를 마치고 의사에게 ‘보통 사람처럼 살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를 기념하는 장발이다. 그동안은 언제 재발할지 몰라 쇼트커트를 유지했다. “길었다가 다시 머리가 빠지면 너무 마음이 아프잖아요.” 소설가는 “’암 팔이 한다’고 수군댈까 봐 그간 병에 관한 이야기는 삼갔다”면서 “건강상의 이유로 작품을 쓰지 못한 때도 ‘그냥 슬럼프가 왔다’는 식으로 뭉뚱그렸다”고 했다. 이번 소설은 자유를 만끽하며 썼다. “쓰면서도 기분이 좋고, 숨 쉴 구멍이 생긴 것 같았어요.”

‘완전한 행복’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장편이자, 욕망 3부작의 두 번째 소설. ‘롤라’라는 가상 세계에서 사람들의 욕망을 먹고 사는 이야기꾼 ‘해상’과 온갖 불행을 겪고 가상 세계로 도망쳐 온 ‘경주’의 이야기다. 경주는 해상에게 기이한 의뢰를 하고, 두 인물의 이야기가 이리저리 얽히면서 소설은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삼면이 바다인 절벽 위에 황량하게 서 있는 노숙자 재활 시설 ‘삼애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독자를 서스펜스의 세계로 초대해 옥죈다. 전작이 행복에 관한 욕망을 다뤘다면 이번엔 ‘야성’에 관한 욕망을 다룬다. 그는 “가축화된 인류에게 ‘야성을 좀 깨워서 네 삶을 상대하라’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걸 말로 하면 꼰대 같으니 문학으로(웃음).”

스릴러 장르의 대가는 “이번 소설은 단순 스릴러는 아니고 SF, 연애 소설을 전부 섞어 짬뽕했다”며 웃었다. 단편 한 권 분량이 될 만한 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넣은 것이 큰 변화라면 변화다. 무엇이 소설가의 연애 세포를 깨웠을까. 소설 집필 중 이집트문화원 초청으로 이집트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 틈에 궁금했던 바하리야 사막 캠핑 투어를 신청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난 장소. 안개가 자욱이 낀 밤의 사막. 소설가는 사막 여우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어요. 운명의 상대를 마주친 것 같은….” 남매로 설정했던 ‘해상’과 ‘제이’를 연인으로 바꾸면서 진한 로맨스 서사로 원고를 뒤엎었다.

2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만난 소설가 정유정. /박상훈 기자

정유정은 지독할 정도로 규칙을 신봉한다. 책 출간 이후 두세 달쯤 인터뷰를 비롯해 각종 행사·강연을 뛰고, 다시 광주 집에 틀어박혀 몇 년간 장편에 매진하는 규칙을 이어 온 지 십 수년째. 이런 쳇바퀴를 깨고 싶진 않을까. “전혀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제대로 썼다는 데서 안정감을 느껴요.” “나이 먹어서 늦잠 자기 시작했다”는 그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데스메탈 음악을 듣고 오전엔 소설을 쓴다. 점심 먹고 나서부터는 그날 쓴 원고 교정을 본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소설가의 일과는 끝난다. 한 시간 러닝, 한 시간 근력 운동을 하는 것으로 머리를 말끔히 비운다.

MBTI로 치면 ‘수퍼 J형’인 통제광(狂)의 면모는 소설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제 소설에서는 파리 한 마리도 지들 맘대로 날아다니면 안 돼요.” 정유정 소설의 인물들은 ‘정유정 월드’에 꽉 붙들려 있다. 그가 만들어놓은 서사, 서스펜스 속에서 주어진 역할이 있는 기능적 존재들. “저는 제 인물들을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면서 다른 길로 새는 것 같으면 끌고 와요.” 독자 역시 그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다. 책을 내려 놓으려 할 때마다, 소설가는 독자를 다시 이야기 속으로 끌고 온다.

☞정유정(58)

2007년 발표한 장편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가 등단작이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고 간호대 졸업 후 간호사로 일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대표작은 장편소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등 이른바 ‘악의 3부작’. ‘스릴러의 여왕’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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