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학문과 정치
올해 광복절 전후로 한국사회 갈등구조의 심층을 보여준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일본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등재와 관련해서 한국 정부의 대응방식을 둘러싼 논란이 시작하더니 ‘독립기념관장’의 임명에 따른 갈등에 이어 광복절 행사는 결국 반쪽으로 끝났다.
학계까지 동원된, 광복절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건국절’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편에서는 국민, 영토와 주권이라는 국가수립의 국제법적 조건을 강조하고, 일본에 대해서 여유와 아량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이야기한다. 다른 편에서는 한 많은 일제강점기를 기억하고 이에 저항했던 위대한 유산을 잊지 말 것을 호소한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밀정’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하더니 국가안보실 실세의 입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는 말까지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흔히 사용하는 단어지만 사회학이나 인류학에서 일본문화의 표징으로 등장하는 일본어 ‘고코로’(心)가 곧 떠올랐다.
국가안보를 총괄하는 이 젊은 고위관리는 미국에 유학해서 주로 일본정치를 전공했던 모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였고 일찍부터 보수정권의 안보에 관련된 요직을 맡았다는 보도를 보고서 내 직감이 별로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대학에서 교수나 연구원 생활을 하다가 정치가로 변신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우선 떠올리게 되는 유명한 인물로 긴장완화의 시대를 열었던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 교수 출신, 헨리 키신저가 있다.
‘라인강 기적’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전 서독 총리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교수자격’ 취득에 실패했다. 1950년 프랑크푸르트대학의 경제학 ‘명예교수’가 되었고 그의 스승이었던 프란츠 오펜하이머가 제기했던 ‘사회적 시장경제’를 실질적으로 확립하였다. 자신의 묘비에 총리 대신에 교수라는 직함이 새겨지길 원했던 생전의 희망대로 교수라는 직함만이 이름 앞에 달랑 새겨진 조촐한 그의 묘비는 지금 뮌헨의 ‘남부묘지’에 있다.
‘학자 정치인’ 공과 극명하게 갈려
이른바 ‘신체제’(1932~1968)라는 이름 아래 포르투갈을 36년 동안 무자비하게 철권통치했던 살라자르도 1290년에 설립되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의 하나이며, 특히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대학 도서관으로 유명한 코임브라 대학에서 국민경제학과 재정학을 가르쳤다.
학자가 정치인이 되는 길은 여러 가지며 또 이들이 학문과 정치의 두 세계를 넘나들며 보여준 공과에 대한 평가도 많은 경우 극명하게 갈린다. 1972년 역사적인 닉슨의 중국방문이 상징했던, 냉전체제 해소에 이바지했던 키신저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그리고 칠레에서 미국의 개입으로 야기된 전쟁범죄에 관한 엄중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스러울 수 없다는 비판의 소리도 그런 예의 하나다.
그럼에도 깊은 학식과 높은 도덕을 겸비한 학자가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다는 기대나 희망은 동서를 막론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지식과 지혜를 겸비한 철인(哲人)이 통치하는 이상국가를 논하였다. 그는 돈과 명예에 무관심하고 오직 진리를 탐구하는 생활을 만끽하는 철인이 왜 골치가 아픈 정치판에 뛰어들어야만 하는가 하는 물음에 폭군, 선동, 과두제(寡頭制)나 재력정치에 나라가 망가지는 것을 막고 공동선을 위해 철인이 정치에 나서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공자도 배움에 항상 정진하여 편협하지 않은 군자의 높은 도덕성에 기반을 둔 덕치(德治)를 이상적인 정치로 여겼고 이의 실현을 위해 주유천하도 했지만, 그의 도덕정치를 펼치려는 꿈은 어느 나라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신의 학문적 이상이 정치상황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는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플라톤이나 공자가 살았던 시대의 학문과 정치 간의 긴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 근대사회에서 이 둘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막스 베버는 그의 두 유명한 강연 - <직업으로서의 학문>(1917)과 <직업으로서의 정치>(1919) - 에서 정리했다.
세속화가 진행된, 탈주술화(脫呪術化) 세계에서 학문과 연구는 그 어떤 비밀스러운 의미를 따지는 종교나 철학적인 과제를 떠나 오로지 가치 중립적으로 전문분야를 탐구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강의실에는 정치를 위한 자리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이런 학문세계와 구별되어야 하는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학문과 정치, 대화로 함께 가야
근세에 들어 성립된 국가가 독점한, 물리적인 폭력을 합리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일련의 ‘직업정치인’이라는 집단이 등장했다. 정치가 생업이라는 뜻도 있고 정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베버는 특히 후자의 의미와 역할에 주목했다. 이러한 직업정치인과 구별되는,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을 소유하여 국가기구의 능률적인 관리를 위임받은 관료의 역할에도 주의를 돌렸다.
그는 직업정치인이 지니는 특성 가운데 국가를 위해 어떤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그들의 특유한 ‘권력감정’에도 주목했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자신들이 대중의 관심의 중심에 서 있다는 자만과 허영심에 쉽게 빠지는 위험을 경고했다.
정치인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 정열, 책임감과 판단력을 강조한 베버는 어떤 정치적 행위나 결정에 도덕적이거나 선한 동기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지만 깊은 사려와 함께 주어진 결과에 대해서 엄격하게 책임을 지는 ‘책임윤리’를 정치인에게 특별히 요구했다.
그러면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정치에 대한 그가 주장한 내용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정보화 시대에 어떤 의미를 전하고 있는가. 최근에 학문과 정치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를 우리는 모두 경험했다. 바로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우선 학문이 정치적 결정에 핵심적 근거를 제시해야만 했는데 전염병 전문가들은 코로나19 팬데믹과의 세기적인 싸움에 적극 참여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어떤 신비스러운 것은 없고 결국 학문과 연구로 밝혀질 것이라는 베버의 주장이 설사 옳을지라도 당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지식은 잠정적이거나 극히 불충분했던 상황이었고 분초를 다투는 싸움에서 시급한 면역전략과 ‘록 다운’과 같은 아주 중요한 정책들을 빨리 결정해야만 했던 정치는 전전긍긍했다.
과거 비교적 제한된 학문공동체 안에서 수행되던 논쟁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되면서 학문과 정치 사이에 있는 긴장은 실시간대에서 움직이는 정보사회 안에서 급속히 확대재생산되었다. 특히 여러 형태와 수준을 지닌 ‘사회관계망’ 안에서 비전문가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견해를 다른 사람과 활발하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소통이 사람들을 오히려 혼란에 빠트리기도 했고 팬데믹을 둘러싼 여러 ‘거짓 뉴스’에 쉽게 휩쓸리게 하였다. 코로나19 백신은 빌 게이츠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비밀리에 개발한 것이라는 주장까지도 나돌았다. 그래서 코로나19 팬데믹과의 싸움은 ‘인포데믹’(Infodemic)과의 힘겨운 싸움을 동반해야만 했다.
올해 6월 초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영일만의 유전개발 뉴스에 대하여 이제는 후속 기사도 별로 없다. 지질 과학적 검증과 유전 개발의 기술적 조건과 개발 이익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나올 때까지 적어도 7~10년은 기다려야 한다.
1976년에도 한국이 산유국이 된다는 기대에 국민이 열광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과학보다 정치가 너무 먼저 나섰던 까닭에 비판의 소리가 있었지만, 이는 곧 반정부적인 언사로 매도되었다. 이번에도 ‘산유국 되는 것이 그리 싫은가?’라는 힐난의 소리가 또 들린다.
<우리는 한 번도 근대적인 적이 없다>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1947~2022)는 자연과 사회를 서로 엄격하게 분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편다. 자연과학과 기술도 사회나 정치와 애초부터 혼합되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베버가 주장했던 것처럼 사회과학이나 역사학이 오늘날 가치나 이념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학문과 정치는 상호 의존하고 서로 도구화한다. 문제는 이런 관계가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긴장을 동반하는 열린 대화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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