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해법은 ‘혐오’가 아니다 [세상읽기]
김현성 | 작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그 어떤 곳이든 사고는 발생하게 마련이다. 특히 평상시에는 접하기가 매우 어려운, 아주 황당한 사유로 인해 사람이, 그것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게 된다면 이런 일은 비단 그 피해자와 주변인들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의 마음을 굉장히 무겁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참사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일정한 치유의 과정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치유의 과정보다는 사건의 원인을 마치 수술하듯 적출해내고 그것을 사회의 적으로 규명하여 배제하려 하는 그런 목소리들이 더 커지고 있다. 특히 이것이 사람의 목숨과 직결된 문제일수록 더더욱 그러하며, 얼마 전 발생한 사건들이 사람의 목숨과 아주 큰 관계를 지닌 ‘교통수단’에서 발생했다는 점은 더욱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던진다고 할 수 있다.
몇주 전, 서울시청 인근에서 차가 엄청난 속력으로 인도로 돌진했고,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 여럿이 눈 깜짝할 사이에, 미처 피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끔찍하게 목숨을 잃었다. 기계적 결함으로 인한 차량의 급발진 문제냐, 그렇지 않다면 착오 운전의 문제냐는 진실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운전자가 노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우리 사회는 엉뚱한 방향으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신체와 인지 능력이 떨어지게 마련인 노인이 자유롭게 운전을 하는 것이 맞냐는 논의가 발생한 것이다.
노인이 운전하지 못하게 된 우리 사회의 미래는 상당히 우스운 꼴이 될 것이다. 당장 지금으로부터 20년만 지나도 신생아 수 20만명대의 세대가 청년 그룹을 형성할 것이고, 현재 경제활동인구의 대다수는 노인이 되거나 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수는 줄잡아 약 2천만명에 육박할 전망인데, 이들이 모두 운전할 수 없게 된다면 가뜩이나 인구가 줄어가는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주게 될까?
한편으로 또 몇주 전에는 다른 사건도 있었다. 인천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주차된 전기차에 화재가 나 수많은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고 많은 주민이 거주지를 잃어 불편을 겪었다. 화재가 번지는 와중에도 스프링클러는 작동하지 않았던 점 등의 수많은 석연찮은 문제가 있었지만, 엉뚱하게도 화살은 전기차 그 자체로 향했다. 배터리에서 화재가 자주 발생한다면서 전기차라는 차종이 모두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죄 없는 전기차 차주들만 쫓겨나듯 외부에 주차하는 웃지 못할 일도 발생하였다. 실제로 순수 전기차보다 하이브리드 차량이나 내연기관 차량이 더 화재 발생 비율이 높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외면받고 말았다.
물론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 그 원인은 어디든 존재하게 마련인 것이고, 사람의 두려움은 근원적 감정이기 때문에 참사의 원인과 동일한 속성을 지닌 그 무엇을 찾아 배척하려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본능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의 문명인이라면 단순히 누군가를 배척하려 들면 곤란하다. 우리는 참사의 재발을 막고 애꿎은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할 공동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앞서 언급한 보도로의 돌진 사고의 경우, 기술은 이미 개발되어 있지만 제조사들이 차일피일 설치를 미루고 있는 페달 블랙박스 설치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마련하는 점을 고민해볼 수 있다.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는 수십년간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되어왔지만 그 기술적 대안은 아직도 도입되지 않았다. 차량의 결함을 차량 소비자가 증명하는 현재의 구조도 미국처럼 제조사가 증명하는 구조로 반드시 개선되어야 하지만 답보 상태다.
전기차의 화재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차량에는 화재의 확률이 존재하지만, 전기차의 비율이 점점 더 늘어나고 배터리, 즉 2차전지가 화재의 주요 원인인 전기차의 특성상 단순한 내연기관 차량의 화재와는 화재 진압 방법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소방 관련 규정을 현실에 맞게 개정하고, 내연기관차의 주유소가 별도로 관리를 받듯이 주거 단지 내의 전기차 충전 시설 역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지상에 의무 설치를 하게 하는 등의 제도적 고려가 반드시 따라와야만 한다.
이러한 노력 없이는 참사가 반복될 것이고, 참사가 반복될 때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탓을 하며 그들을 배제하려 할 것이다. 배제가 반복되는 사회에 희망은 없다. 우리는 혐오의 물결을 ‘기술’과 ‘제도’로 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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