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주의 광기 치유하는 특효약 [김누리 칼럼]
동북아 3국의 청년세대 사이에 너무도 큰 선입관과 편견이 자라고 있다. 일본에선 혐한, 혐중의 정서가 널리 퍼져 있고, 중국에서도 광적인 애국주의의 분위기가 편재하고 있으며,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반일, 혐중 정서가 뿌리 깊다. 지금 동북아에선 민족주의, 애국주의, 국가주의, 국수주의의 광기가 번져가고 있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지난 26일 월요일부터 중앙대학교에서는 ‘동북아여름평화학교 2024’가 열리고 있다. ‘지구적 대변동의 시대 동북아 평화’라는 주제로 일주일간 진행되는 이번 행사에는 일본의 도쿄대, 중국의 베이징대, 한국의 중앙대 대학원 석박사 과정생을 주축으로 하고 독일, 네덜란드, 이스라엘, 브라질, 칠레 등에서 온 학생들을 포함하여 40여명의 대학원생이 참여하고 있다.
동북아여름평화학교의 구상은 사실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중앙대가 2013년에 독일 정부가 지원하는 ‘독일유럽연구센터’로 선정되었을 때, 나는 이 연구소가 무엇보다도 동북아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이전에 이미 독일유럽연구센터로 선정되어 있던 도쿄대와 베이징대에 ‘동북아독일유럽학회’를 창설할 것을 제안했고, 양 대학이 이를 흔쾌히 수용함으로써 3개 대학의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나는 다음과 같은 취지로 동북아독일유럽학회 창설 제안문을 썼다.
“동북아 평화공동체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 중국, 한국의 ‘독일유럽연구센터’가 함께 힘을 모아 ‘동북아독일유럽학회’를 창설할 것을 제안한다. 동북아 평화공동체의 실현은 위대한 이상이지만, 동시에 거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세개의 커다란 장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일본의 과거이고, 둘째는 한반도의 현재이며, 셋째는 중국의 미래다. 일본의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동북아의 화해를 가로막고 있고, 한반도 ‘남북 분단의 현실’이 동북아를 물리적으로 갈라놓고 있으며, 중국의 ‘헤게모니적 지배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주변국 국민들의 집단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동북아 지역이 안고 있는 바로 이 세가지 문제, 즉 과거 청산, 분단, 패권주의의 문제를 모두 풀어낸 나라가 딱 하나 있다. 바로 독일이다. 독일은 나치즘의 과거를 모범적으로 청산했고, 동서독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었으며, 두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패권국가 독일’에 대한 주변국의 불안을 성공적으로 불식시켰다. 그 결과 유럽연합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한국, 중국, 일본은 독일의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거기서 동북아 평화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전망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 동북아 평화공동체의 꿈은 더욱 절실해졌다. 동북아 3국의 청년세대 사이에 너무도 큰 선입관과 편견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혐한, 혐중의 정서가 널리 퍼져 있고, 중국에서도 광적인 애국주의의 분위기가 편재하고 있으며,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반일, 혐중 정서가 뿌리 깊다. 지금 동북아에선 민족주의, 애국주의, 국가주의, 국수주의의 광기가 번져가고 있다. 마치 동북아 전체에 혐오의 휘발유를 뿌려놓은 형국이다. 정치적 선동가가 등장하여 불씨 하나만 던져도 동북아 전체가 훨훨 타오를 형국이다.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2015년 나는 중앙대 학생들을 인솔하여 독일 남서부의 오첸하우젠에 있는 ‘아카데미 유럽’이라는 학술캠프에 베이징대 학생들과 함께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양국의 학생들은 함께 수업을 들으며 토론하고, 발표하고, 현지답사도 같이했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처음엔 서로 어색해하고 낯설어하던 한국과 중국 학생들이 불과 2, 3일 만에 서로에 대한 선입관과 편견을 깨고 가까운 친구가 된 것이다. 중국 영화, 한국 드라마, 케이팝에서 출발하여 독일 소설과 철학자들을 거쳐 동북아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는 게 아닌가. 헤어질 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오첸하우젠의 경험으로 나는 ‘만남이 기적을 만든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동북아 지역에 급속히 확산되는 불길한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의 광기를 치유하는 특효약은 다름 아닌 ‘만남’이다.
나는 동북아여름평화학교의 개막연설을 평화의 기원으로 마무리했다. “우리는 오늘 동북아 평화의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 씨앗이 자라 무성한 평화의 숲을 이룰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리고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를 함께 부를 것을 제안했다. “환희의 마법은 관습이 갈라놓은 모든 것을 연결해준다. 환희의 날개가 머무는 곳에 모든 이가 형제가 된다.” 환희의 송가가 ‘유럽연합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민족, 국가, 계급, 성별 등 ‘관습’이 갈라놓은 모든 것을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환희의 마법이 아닌가. 동북아, 나아가 세계의 모든 젊은이들이 환희 속에서 선입관과 편견을 넘어 평화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미래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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