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심 줄어든 관객, 쉽고 재밌어야 붙잡죠”

백승찬 기자 2024. 8. 2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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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강쇠 점 찍고 옹녀’ 극본·연출 고선웅
역동적인 옹녀가 주인공…해학 가득한 ‘18금’
창극 최고 흥행작…초연 10주년 기념공연
연출가 고선웅이 26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잃어버린 판소리 일곱 바탕 중 하나인 ‘변강쇠타령’의 등장인물 변강쇠는 통상 남성성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막상 판소리 사설을 읽어보면 천하의 몹쓸 인간이다. 만나는 남편마다 여러 이유로 죽어나가 곤란해진 옹녀를 만나 해로하는 건 좋았으나, 변강쇠 하는 짓은 영 목불인견이다. 살림살이를 챙기기는커녕, 옹녀가 번 돈을 노름판에 족족 날린다. 나무라도 패 오라는 옹녀의 성화에 변강쇠는 길가의 장승을 냅다 뽑아 온다. 변강쇠는 동티가 나 죽으면서도 옹녀의 개가를 막으려 든다.

10여년 전 연극 연출가 고선웅이 첫 창극 연출을 의뢰받았을 때 변강쇠가 아니라 옹녀를 주인공으로 각색한 건 자연스러웠다. “주인공은 추동력이 있어야 하는데, 변강쇠는 도끼로 장승 팬 뒤에 그냥 죽거든요. 그럼 연극이 끝나는 거니까.”

2014년 초연한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창극 역사에 기념비를 남긴 작품이다. 최초의 18금 작품이자, 초연 이후 8년 연속 공연하며 누적 4만7000여 관객을 만난 역대 최고 흥행작이다. 2016년에는 프랑스 파리 테아트르 드 라 빌에 창극 최초로 초청되기도 했다. 다음달 5~15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공연은 초연 10주년 기념 공연이자, 5년 만의 서울 공연이다. 초연부터 출연했던 이소연·최호성 커플에 김우정·유태평양 커플이 새로 합류했다.

26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고선웅은 변강쇠타령이 보여준 해학과 기층민중의 삶에 끌렸다고 했다. 춘향가, 적벽가, 심청가에는 한자가 많아 소리만 들어선 이해가 어려운 대목도 있었지만, 변강쇠타령은 “말이 편안하고 서사가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 역동적인 옹녀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원작에서 옹녀는 변강쇠의 시신을 처리한 뒤 자취를 감추지만, 고선웅은 옹녀가 변강쇠를 되살리기 위해 장승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바꿨다. “동네 총각 다 잡아먹었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아랑곳없이 옹녀는 상복을 벗고 색깔 치마를 입은 뒤 “풍상이든 뇌우 치든 살아남아 내 한 서린 사연을 후세까지 전할란다”라고 외친다.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없다는 이치를 받아들인 뒤에는 태중의 생명을 제대로 키워내겠다는 삶의 의지를 새긴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에는 적나라한 성적 묘사가 많이 나온다. 고선웅은 “직접적인데 외설적이지 않을 수 있고, 직접적이지 않은데도 불쾌할 정도로 외설적일 수 있다”며 “이 작품에서 관객은 무방비하게 직접적인 묘사를 겪는데도 매우 관대하고 재미있어한다. 타당한 맥락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작품 연습 과정에서 ‘삶의 활력’을 얻는다고 했다. 아침부터 연습해도 지지치 않고 행복하다. 공연의 재연, 삼연 지속 여부는 공연 당시의 감동보다는, 먼 훗날 ‘그 작품 어땠어?’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소환되는 기억에 달려 있다고 했다. 그건 ‘구체적 사실’이 아니라 ‘세포의 기억’이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그렇게 세포로부터 행복감이 나오는 작품이다.

고선웅은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핵심이 ‘사랑’이라고 본다. 종반부 옹녀는 자신과 변강쇠가 “천생연분으로 경계를 넘어 사랑”했다고 자부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사랑의 결과물로 잉태되는 생명을 두고 덕담을 하면서 끝나거든요. 사랑을 말하면서도 부담스럽거나 긴장감을 주는 게 아니라, 재미와 해학이 있고 즐겁습니다.”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한 장면. 국립극장 제공
2016년 프랑스 테아트르 드 라 빌 공연 당시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국립극장 제공

2018년 평창 동계패럴림픽 개·폐회식을 연출했고, 이듬해엔 이해랑연극상을 받았다. ‘스타 연출가’란 수식을 달고 다니는 그는 2022년엔 3년 임기의 서울시극단 단장으로 취임했다. 화려한 수상 경력 등을 보면 진지하고 복잡한 작품을 추구할 것처럼 보이지만, 늘 ‘재미있는 연극’ ‘쉬운 연극’을 강조한다. “연극 볼 때 제일 짜증 나는 게 옆 사람에게 ‘지금 뭐라고 한 거야?’라고 물어야 할 때죠. 단어든 내용이든 바로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어야 쉽고 좋은 연극입니다.”

고선웅은 현장에서 볼 때 관객의 인내심이 과거보다 줄어들었음을 느낀다고 했다. “과거 관객은 초반에 조금 지루해도 참고 견뎠는데, 이제는 곧바로 숨이 가빠진다”는 것이다. 고선웅은 “극에 꼭 필요한 장면이라면 관객이 주무시더라도 넣지만, 그렇지 않다면 과감히 관객의 니즈를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관객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온라인의 관객 평점을 꼼꼼히 살피고, 점수가 낮으면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회의와 개작을 거듭한다. 세간의 평가와 그에 대한 대응이 쌓이는 사이, 작품은 관객의 기호에 안착하고 명성은 확고해진다. 남은 서울시극단 단장 임기도 “점수를 따는 게 아니라 실수를 안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11월에는 조선 시대 여러 전쟁 속 가족의 이산과 재회를 그린 서울시극단 신작 <퉁소소리>를 직접 각색하고 연출한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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