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애 칼럼] AI, `D램 신화`의 결기로 뭉쳐라
1984년 말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기술담당 부사장실. 과학기술처 고위 공직자가 경상현 부사장(작고·전 정보통신부 장관)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반도체가 장차 나라를 먹여살릴 산업인데, 기업들이 기술과 경험, 자본이 모두 부족하니 정부가 도와야 하는데, 재원이 부족하다며 협조를 구했다.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이 반도체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공표한 1983년 '2·8 도쿄선언' 다음해였다. 미·일이 반도체 최선두를 달리고, 우리나라는 막 걸음마를 뗀 상태였다. 이 회장은 전두환 대통령을 찾아가 기업의 힘만으론 못하니 정부가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경 부사장은 통신공사가 나서야 한다고 내부를 설득했다. 그 결과 과기처가 100억원, 통신공사가 그 2배인 200억원을 마련했다. 여기에 다른 기업들이 보태서 총 400억원이 모였다. '메모리 반도체 글로벌 1등'의 마중물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이를 재원으로 1986년 4M D램 개발이 시작됐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ETRI)를 중심으로 삼성반도체통신, 금성반도체, 현대전자, 서울대 부설 반도체공동연구소가 뭉쳤다. 각자 하면 안 될 일이 모이니 진척이 빨랐다. 1989년 미·일보다 1년 정도 늦게 4M D램을 개발해냈다. 64M D램은 우리나라가 1992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후 256M D램도 최초로 개발하고, 세계 메모리 점유율 1등에 올라섰다. 세계 1등을 지금까지 지키며 국가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당시엔 의심과 우려가 많았다.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를 쏟다가 자칫 그룹이 흔들릴 수 있다는 걱정이 컸다. 그럼에도 이병철 회장은 "삼성이 아니면 모험을 하기 힘들다"며 투자를 밀어붙였다. 전전자교환기(TDX)를 팔아 번 돈을 모두 쏟아붓고, 적자를 봐가며 허허벌판에 반도체 생산라인을 하나씩 늘렸다.
한국의 D램 신화는 불확실성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국가대표급 기업들이 힘을 모은 덕분이었다. 기업들은 공동연구를 하면서 경쟁도 했다. 안 되면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절실함이 바탕에 있었다.
40년이 흐른 지금, AI라는 큰 산이 우리 앞에 놓였다. 일본이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 절대적 강대국 두 곳을 힘겹게 따라가는 처지다. 수백~수천조를 주무르고, 없어서 못 사는 AI칩을 수십만개씩 척척 사는 글로벌 빅테크와 국내 기업들은 체급부터 차이가 크다. 다행히 당시보다 우리 기업들이 더 강해졌고, 세계 1등 반도체 산업이 버티고 있다. 세계적으로 드물게 자체 플랫폼과 AI모델도 갖고 있다.
고무적인 것은 기업들이 AI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부족함이 없을 때는 나홀로 생존이 가능하지만 AI는 그래선 안된다. 워낙 변화 속도가 빠르고 투자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거대 빅테크조차 경쟁사, 신생사 가리지 않고 손을 내미는 이유다.
유영상 SKT 사장이 최근 '이천포럼'에서 한 얘기가 귀에 와서 박혔다. 유 사장은 "SK그룹의 역량을 총결집하고 'AI 밸류체인' 리더십을 강화해 변화의 기회를 빠르게 잡아내겠다"면서 "그룹의 자산을 바탕으로 삼성전자, 네이버 등과 '대한민국 AI 어벤져스 팀'을 꾸려 글로벌에 같이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태원 SK 회장도 "중간에 덜컹거리는 과정이 있겠지만 AI 산업은 우상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며 투자 의지를 분명히 했다.
다시 한국이 뭉쳐야 할 때다. AI 시대에는 과거의 수직적 공급망과 전혀 다른 개념의 협업이 필요하다. 대기업 밑에 협력사들이 줄 서는 구조가 아니라, 수평적 협업에 바탕을 둔 '가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유 사장이 그룹 행사에서 삼성, 네이버를 직접 거명하며 공조 의지를 밝힌 것은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일 거다. SKT는 이미 글로벌 통신사들과도 연맹을 만들고 앤스로픽·퍼플렉시티 같은 스타트업에 투자하는가 하면 국내 기업들과도 얼라이언스를 키우며 'AI 가치 네트워크'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SKT의 AI반도체 자회사 사피온과 KT가 투자한 리벨리온의 합병도 상징성이 크다. KT와 LG유플러스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통신사들이 가진 특유의 기민성과 자금력, ICT 산업 전체를 아우르는 네트워킹 능력이 AI시대에 빛을 발하고 있다.
이제 대기업들이 담을 허물고 AI 협업을 시작해야 한다. 구글, MS, 아마존과 손잡으면서 국내 기업끼리 거리를 둘 이유가 없다. 40년전 KT의 도움을 받아 반도체 신화를 쓴 삼성이 움직일 때다. D램 신화를 쓴 40년전의 결기로 K-대표기업들이 다시 한번 뭉쳐야 한다. 정부도 힘을 실어줘야 한다. 늦기 전에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한다. ICT과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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