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무덤 파는 경제계의 ‘ESG 워싱’ [아침햇발]

곽정수 기자 2024. 8. 2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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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4일(현지시각)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의회 본회의에서 회원국들이 기업에 인권 및 환경 보호를 의무화하는 유럽연합(EU) 공급망 실사지침(CSDDD)을 표결로 통과시키고 있다. 연합뉴스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한국 기업들은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기를 바란다.”

최근 경제계 인사가 전해준 ‘웃픈’ 얘기이다. 7월 말 유럽연합(EU)의 공급망 실사지침(CSDDD) 발효로 비상이 걸린 기업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한 자리였다. 트럼프가 당선되면 환경·사회·지배구조를 강조하는 이에스지(ESG) 규제가 후퇴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라고 한다. “설마, 설마” 하며 글로벌 이에스지 규제에 대한 대응 준비를 소홀히 한 한국 기업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시험날이 임박하도록 공부를 안 하다가, 시험이 무산되기를 바라는 학생의 심정이랄까?

경제계는 공급망 실사보다 더 시급한 게 있다고 입을 모은다. 바로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철강·알루미늄 등 6개 품목을 유럽연합에 수출하는 기업은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탄소배출량을 보고하고 있다. 2026년부터는 유럽연합 기준을 초과하는 배출량만큼 탄소배출권을 구매해야 한다. 철강업계가 직격탄을 맞게 됐다. 탄소를 줄이지 못하면 연간 수천억원의 추가 부담이 예상된다.

공급망 실사 충격도 만만찮을 것으로 전망된다. 2027년 7월부터 유럽연합 거래 기업은 공급망 내 협력사까지 포함해 환경·인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요인을 미리 파악해서, 개선 조처를 하고 공시까지 해야 한다. 지침을 어기면 전세계 연간 매출액의 5%를 넘는 벌금이 부과된다. 대기업은 일시에 수천억원 내지 수조원의 철퇴를 맞을 수 있다.

탄소국경조정제도 도입은 수년 전부터 제기됐다. 공급망 실사는 1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국내의 탄소배출량 산정과 감축, 공급망에 대한 환경·인권 실사 준비는 아직 초보 단계이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4월 ‘2030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2018년 대비 40%로 유지하면서, 산업계의 배출량 감축 목표를 14.5%에서 11.4%로 낮추었다. 환경단체의 비난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경제단체와 보수 언론은 “낮춘 목표도 여전히 달성이 쉽지 않다”고 항변했다.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국내 탄소규제를 미루고 회피하는 게 해결책인가? 글로벌 규제를 충족하지 못하면, 결국 재앙 아닌가? ‘우물 안 개구리들’의 비애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에너지 위기 때문에 글로벌 이에스지 흐름이 주춤한 적이 있다. ‘이에스지 전도사’로 불리던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최고경영자(CEO) 래리 핑크는 “이에스지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경제단체들은 기다렸다는 듯 반색했다. 일부 보수 언론은 이에스지 시대가 끝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위기가 진정되자 어찌 되었나? 기후위기 극복과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이에스지 규제가 하나하나 현실화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에 또다시 거부권을 행사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와 한국경제인협회는 “결단”이라고 박수를 쳤다. 노동기본권 보호는 유럽연합 공급망 실사지침의 인권 항목에서 핵심이다. 경제계는 중대재해처벌법도 반대한다.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 보호는 공급망 실사 대상 항목의 맨 앞에 나온다. 경제계가 이에스지 규제로 비상이라면서, 이에스지 이행에 필요한 법들을 거부하는 것은 모순이다. 제정신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경제계는 이에스지 공시 의무화도 2029년으로 연기할 것을 주장한다. 정부는 이미 경제계 요청을 받아들여 2025년 시행 계획을 2026년 이후로 한차례 연기한 바 있다. 유럽과 미국은 2024~2026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한다. 미국 증시에 상장한 국내 대기업은 2026년부터 실질적인 적용을 받는다. 이러다간 한국 기업이 외국에서는 공시하면서, 정작 국내에서는 하지 않는 희한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 경제단체 회의에서도 사전준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무시됐다고 한다.

지속가능보고서를 발간하고, 이에스지위원회를 만드는 기업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에스지 실천을 위한 법제도에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행동 대신 말로만 하는 ‘이에스지 워싱’이다. 보수 언론도 국민을 기만한다. 왼손으로는 이에스지가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강조하며 각종 포럼, 교육, 컨설팅으로 돈벌이하는 데 여념이 없다. 하지만 오른손으로는 이에스지 규제에 반대하는 나팔수 노릇을 한다. 경제계의 ‘이에스지 워싱’은 자기 무덤을 파는 자해행위다. 이에스지 실행에는 당연히 부담이 따른다. 하지만 글로벌 규제를 피할 수 없다면, 당장은 힘들더라도, 신속히 대처해서 적응하는 게 장기적으로 기업 이익에 부합한다. 한국처럼 수출 비중이 높은 개방경제에는 생존 문제다.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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