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 씨도 안 먹힌 한동훈 ‘의대 중재안’…그 전말은
의-정 갈등 장기화로 인한 의료 대란을 풀어보려는 여야 노력이 가시화하고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모두 임계치를 넘어선 ‘국민 생명 위기’ 단계로 받아들인 것이다. 2천명 증원을 고수하며 의료계와 대결 구도를 풀지 않는 윤석열 대통령과는 ‘각’이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집권여당 쪽 중재자를 자임한 한 대표의 중재안을 대통령실에서 평가 절하하며 거부한 사실이 알려지자, 한 대표와 용산 사이의 갈등이 의-정 갈등 문제에서도 불거지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 26일 오후 대통령실은 의대 증원과 관련해 “정부가 여러 데이터나 근거, 미래 전망, 이런 것들을 정확히 측정해서 책임 있게 결정한 사안이다. 이걸 어디 합의 보거나 협상해서 결정해선 안 되는 사안이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국회가 법으로 정하거나 의료계와 협상해서 아무런 근거 없이 결정해선 안 될 사안”이라고 했다. 이때만 해도 여야 움직임에 대한 원론적 설명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날 저녁 국민의힘 고위 관계자를 인용한 단독보도가 나오면서 여의도가 시끄러워졌다. 한 대표가 지난 25일 열린 고위 당정협의회에서 ‘2026년도 의대 정원 유예안’ 중재안을 대통령실에 전달했지만, 이를 거부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디 협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라는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 발언은 한 대표를 겨냥한 것이었다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의 확인 요청에 대통령실은 “(고위 당정협의회) 회의 석상에서 논의된 바 없다. 여러 가지 경로로 다양한 제안들이 들어온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에 변화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튿날인 26일 오전 국민의힘 쪽에서 “고위 당정협의회 안건은 아니었지만, 당정협의에 참석한 한덕수 국무총리와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이런 중재안을 얘기했다. 두 사람이 이를 대통령실에 전달했는데 받아주지 않은 것”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종합하면, 고위 당정협의회 정식 안건은 아니었을지라도 집권여당 대표가 제시한 중재안을 대통령실이 거부한 뒤 언론에는 “여러 가지 경로의 제안” 정도로 평가 절하한 셈이다.
민생을 앞세워 윤 대통령과 차별화를 꾀하고 있는 한 대표는 최근 의료계와의 접점을 넓히며 의-정 갈등 해결의 키를 여당 쪽이 잡으려는 행보를 해왔다. 다만 윤 대통령의 의대 증원 의지는 워낙 확고하다. 임기 중반이 되도록 뚜렷한 국정 성과가 없는 상황에서 외치에서는 ‘한·미·일 안보협력’을, 내치에서는 ‘의대 증원 완수’를 고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실과 충분한 사전 교감 없이 이뤄진 한 대표의 중재안이 달가웠을 리 없는 셈이다.
윤석열-한동훈 갈등 가능성이 제기될 때마다 대통령실과 한 대표 쪽은 ‘충분한 소통을 하고 있다’고 말해 왔지만, 당장 의료 대란이라는 핵심 국정 현안에서조차 엇박자와 불통을 드러낸 상황이 됐다. 한 대표는 27일 중재안 거부 사실을 묻는 기자들 질문에 “국민이 원하는 의료개혁의 본질과 동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국민의 걱정과 우려를 경감시킬 수 있는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여러 의견을 정부와 나눈 바 있다. 논의 중이어서 내용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대통령실과 한 대표의 의-정 갈등 중재안 충돌 상황은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오는 30일 열리는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당 지도부 만찬 회동 자리를 껄끄럽게 만들 수 있다. 대통령실 입장에서는 한 대표가 의-정 갈등 중재자 이미지를 위해 언론을 통해 대통령실을 구석으로 몰았다고 의심했을 수도 있다.
한 대표는 지난 20일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을 비공개로 만났다. ‘비공개 만남’ 사실은 지난 25일 저녁 국민의힘 관계자를 인용한 단독보도로 알려졌다. 이튿날인 26일 아침 한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의료개혁 과정에서 나온 여러 걱정이 많다. 정부가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저도 노력 중이지만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박단 위원장과의 만남이 여러 언론에 보도된 상황이었다. 이날 박단 위원장은 “비공개로 상호 합의된 만남을 일방적으로 언론에 흘려 다소 유감이다. 국민의힘 측에서 부러 (만남 사실을) 공개한 것은 결국 한동훈 당 대표의 결심과 의지의 표명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을 설득해달라”고 했다.
한 대표는 검찰 시절부터 구속영장 청구 등 주요 국면마다 언론을 활용했다. 이번에도 ‘박단 비공개 만남→단독보도→중재안 비공개 전달→대통령실 거부 단독보도’ 패턴이 나타났다.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은 26일 아침 시비에스(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의대 증원 유예를 대통령이 거절했다는 보도는 누가 봐도 여당에서 흘린 것이다. 앞으로 여당에서 흘리는 것들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여당에서는 나름대로 민심을 챙기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당 대표 입장에서는 대선 주자로서 자기가 살아야 되니까 ‘대통령이 우리 말 안 들어요’라고 고자질하는 것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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