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나저러나 노후에 받는 국민연금 깎겠다?
“우리 사회를 공정하고 건강하게 만들 연금개혁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맞춤형 약자 복지를 확충하고 모든 국민의 자유를 지키겠습니다.”
2024년 8월15일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서 가장 주목받은 부분은 ‘반국가 세력과의 항전’과 일본의 책임을 말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연금개혁에 대한 언급도 이에 못지않게 눈길을 끌었다. 제21대 국회에서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를 만들어 논의하고 공론화위원회와 시민대표단 500명이 숙의를 통해 합의한 ‘더 내고 더 받는 연금개혁안’을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한 것이 겨우 두 달 전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실과 언론의 연금개혁안 ‘스무고개’
어떻게 연금을 개혁하겠다는 구상인지는 광복절 당일 오전 한국일보의 단독보도로 먼저 알려졌다. 대통령실이 ‘세대별 보험료 인상 속도 차등화’와 ‘기금 자동안정화 장치 도입’을 골자로 하는 연금개혁안을 이르면 2024년 8월 말 발표한다는 내용이었다.
개혁안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아 언론은 당황했다. 기자들의 질문에 대통령실은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면서도 “세대별 보험료율 차등 인상과 기금 자동안정화 장치 도입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은 맞는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실이 설명한 내용을 종합하면, 우선 ‘차등 인상’은 청년층의 보험료율을 중·장년층보다 천천히 올리도록 세대를 나누는 방안이다. 세대별로 보험료율을 차등 적용하는 방안은 2023년 10월 정부가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 발표에서 “보험료율 인상 속도를 연령그룹에 따라 차등 적용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과 같은 맥락이다.
대통령실은 “세대 간 형평을 위한 조처”라고 강조했으나 구체적으로 세대를 어떻게 나눌지, 연간 보험료율을 어떻게 설정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4050(중·장년층)세대는 매년 1%포인트씩 4년에 걸쳐 보험료율을 높이고, 2030세대는 그 절반인 0.5%포인트씩 8년에 걸쳐 보험료율을 인상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제21대 국회는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9%에서 13%로 4%포인트 높이는 데 합의한 바 있다.
‘자동안정화’는 국민연금 기금 운용 수익률과 출산율, 기대여명 등의 지표에 따라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구상이다. 국회 논의와 법 개정을 거치지 않고도 국민연금을 고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실은 이 두 가지 장치 도입으로 국민연금 고갈 시점을 30년(2055년→2085년) 늦출 수 있으리라 내다봤다.
소득 구간별 차등이 제도 취지 부합해
학계와 시민사회에선 “황당하다”는 반응이 터져나왔다. 세대별 차등 보험료율 적용은 개인 능력에 따라 보험료를 부담하는 ‘사회보험의 기본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소득이 많아도 젊다는 이유로 낮은 보험료율을 적용하고, 소득이 적어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높은 보험료율을 적용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남찬섭 동아대 교수(사회복지학)는 “40대와 50대는 남은 연금보험료 납부기간이 길지도 않아서 재정 효과도 크지 않은데 굳이 이렇게 나누려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정말 보험료율을 다르게 적용하고 싶으면, 세대가 아니라 소득 구간별로 보험료율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이 국민연금 제도 취지에 더욱 부합한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도 소득이 아니라 연령과 세대에 따라 보험료율을 다르게 적용한 경우는 없다. 북유럽 국가인 핀란드에서 고령인구의 노동과 고용을 촉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보험료율과 연금지급률을 올린 사례가 있었지만, 세대별 형평성을 보장하기 위한 조처는 아니었다. 김원섭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지금도 국민연금 평균 급여 수준이 55만원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절반인데, 진짜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노인빈곤 상황을 호도하고 세대별로 갈라치기 하려는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결국 현재 노인세대든, 미래에 노인이 될 젊은 세대든 노후는 알아서 준비하고 각자도생하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자동안정화 장치 도입도 기본적으로 소득대체율을 낮춰 ‘연금을 덜 주겠다’는 방안이어서 더욱 위험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통령실의 구상은 국민연금연구원(연금연구원)이 2024년 7월31일 공개한 ‘국민연금 자동조정장치 도입 필요성 및 적용 방안’ 보고서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해당 보고서에서 연금연구원은 ‘수급 개시 연령 조정’과 ‘연금액 조정’을 제안했다. 2033년 65살인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68살까지 조정하거나, 연금액을 2025년부터 가입자 감소와 평균수명 증가를 고려해 자동으로 줄이는 것이다. 연금연구원은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5%까지 올리고, 자동안정화 장치가 더해지면 현재 2055년인 기금 소진 시점을 17~38년 늦출 수 있다고 내다봤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더라도 결국 국민이 받는 연금액을 줄이겠다는 것이 이번 방안의 고갱이다. 이에 정부가 65살 이상 노인의 빈곤율이 40%를 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고, 회원국 평균 빈곤율(14.2%)의 세 배에 육박하는 현실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대통령실은 이런 비판에 대해 “국민연금 기금 운용 수익률과 출산율, 기대여명 등의 지표에 따라 자동적으로 조절된다는 것이지, 무조건 연금 수급액을 깎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출산율이 높아지지 않고 기대여명이 줄어들 것으로 내다보기 힘든 상황과 세계 경제 상황에 따라 변동성이 큰 기금 운용 수익률을 고려하면 연금 수급액이 늘 것으로 예상하기 어렵다. 주은선 경기대 교수(사회복지학)는 “한국은 2007년 연금개혁에서 소득대체율을 60%에서 40%로 낮춰 기금 소진 시점을 13년 늦췄는데, 대통령실의 주장대로 기금 소진 시점을 30년 늦추려면 급여를 대폭 깎아야 한다”며 “결국 법정 소득대체율을 조정하지 않고, 자동안정화 장치라는 매우 복잡하고 위장된 방식으로 연금 수급액을 깎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인 빈곤율 1위, 평균 수령액 55만원인데…
물론 정부가 연금개혁의 구체적 구상을 밝힌 걸 두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허술한 개혁안을 갖고 국민 합의를 도출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오종헌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연금행동) 사무국장은 “대통령실에서 발표한 연금개혁안을 보면 결국 노후 소득보장을 내팽개치고 재정안정만을 중시하고 있다”며 “제21대 국회에서 연금특위를 만들어 논의했던 내용을 모두 무시하고, 공론화위 시민대표단이 결정한 내용을 모두 뒤집는 것인데 이 정도 수준의 내용으로 국회에서 합의를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