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걸린 동성애자의 비극…'엔젤스 인 아메리카' [리뷰]

김소연 2024. 8. 2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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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에이즈에 걸린 주인공 프라이어 역의 손호준이 천사 역의 권은혜와 마주하고 있는 장면. /사진=글림컴퍼니 제공

"친구들은 날 침착하고 차분한 여왕님으로 아는데, 요즘은 늘 불안해요."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배우 유승호, 손호준이 더블 캐스팅된 프라이어 윌터의 대사 중 일부다. 극의 배경이 되는 1985년 미국 뉴욕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오랜 전통을 가진 백인 와스프 가문 출신이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성별은 남자다. 그뿐 아니라 중년배우 이효정, 김주호가 맡은 보수주의 정치계 유력인사이자 성공한 변호사인 로이 M. 콘 역도 동성애와 에이즈라는 설정이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는 다수의 동성애자가 등장한다. 모든 남자 출연자가 알고 보니 동성을 좋아했다는 설정이다. 홍일점 캐릭터인 하퍼 아마티 피트는 모르몬교 신자이지만 약물중독자다. 차별과 편견의 표적이 된 사람들이 나와 그들이 겪는 혼란과 현실, 그리고 이상을 전하는 게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주요 줄거리다.

1980년대의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후 시장 중심 경제 정책 '레이거노믹스'를 내세우면서 사회 분위기도 보수적으로 얼어붙었다. 당시 레이건 정부와 주류 언론은 1981년 최초의 에이즈 환자가 보고된 후, 6년 뒤 2만명이 넘는 희생자가 나올 때까지 공식 석상에서 에이즈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에이즈는 빠르게 확산됐고, 당시 유명 배우였던 록 허드슨도 에이즈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미국 사회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쓴 토니 커쉬너 작가는 그 스스로가 유대계 성소수자로 당시를 살아냈다. 자신의 정체성과 고통스러웠던 개인사를 무대 위에서 풀어낸 것.

시대와 배경을 알고 본다면 더욱 깊이있는 이해가 가능하겠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동성애자가 '소수자'로 분류되며,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만연한 만큼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공감하는 데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국내에서 낯설지만, 보수적인 기독교 분파로 알려진 몰몬교와 유대교의 율법과 이로 인한 혼란 역시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내려져 있다.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로이 역 이효정/사진=글림컴퍼니


캐릭터에도 당시의 상황을 녹여냈다. 특히 변호사 로이의 경우 '악마의 변호사'로 불렸던 동일 인물이 실존한다. 로이는 매카시즘 광풍 속에 승승장구하며 전국적인 인지도를 쌓았고, 로젠버그 부부를 간첩으로 몰아 사형 판결을 이끌었다. 하지만 1984년 에이즈 판정을 받고, 1986년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는 에이즈에 걸렸음에도 "간암"이라고 우기고, 동성애자임에도 "심심풀이로 남자와 섹스하는 이성애자"라고 우기는 식으로 묘사됐다.

극은 프라이머와 그의 동성애 감염 소식을 알고 떠나가려는 연인 루이스, 모르몬교 부부 조셉과 하퍼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로이는 조셉의 사수이고, 루이스는 조셉이 근무하는 법원의 직원이라는 설정으로 이들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다만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고, 현실과 이상에 대해 담론이 다소 장황하게 펼쳐지면서 집중하지 않으면 흐름을 따라가는 게 쉽지 않다. 에이즈 투병 중 독백하는 프라이머와 약물에 취한 하퍼가 각자의 세계에서 만나고, 프라이머에게 천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설정들이 그렇다.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유승호/사진=글림컴퍼니


각각 캐릭터들 모두 각자의 사연과 서사가 있다. 이것들을 설명하느라 정작 등장인물들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이야기는 힘은 빠져 있다는 점도 극의 몰입을 어렵게 하는 요소로 꼽힌다. 두 개의 회전형 무대가 쉼 없이 교차하며 화면이 전환돼 지루할 틈이 없지만, 동시에 혼란도 야기한다.

프라이어 역의 유승호와 손호준, 하퍼 역의 고준희 모두 이번이 연극 데뷔 무대다. 손호준은 동성애 연기부터 드랙퀸 분장까지 소화했지만, 극의 중심축이 되는 무게감은 덜했다. 유승호 역시 아쉬웠다는 평이 나오고 있고, 고준희는 대사 처리에 불안한 모습을 보여 불안함이 객석까지 전달됐다. 하지만 이효정 등 노련한 연기자들의 활약이 종잡을 수 없는 전개의 극에 흐름을 바꾸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실제로는 부자(父子) 관계인 이유진과 직장 상사와 후배로 연기하고 각자의 성적 취향을 확인하는 모습도 색다른 재미를 안긴다.

이번 공연은 파트1 '밀레니엄이 다가온다'만 무대에 올린 것. 그런데도 상연 시간은 적지 않다. 200분이라고 안내됐지만, 2회의 인터미션을 포함해 3시간 넘게 공연이 진행된다. 파트2까지 포함하면 총 8시간으로 알려졌다.

한편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오는 9월 28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선보여진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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