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우리는 왜 조선궁궐을 복원하는가

2024. 8. 26.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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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복원은 서울 근원 복원
국가 발전 대한 자신감의 표현
일제에 왜곡된 역사 바로잡기
이 시대의 한국인 정당한 권리

조선 궁궐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해방 후, 우리는 식민지 경제 수탈과 한국전쟁의 피해로 과거를 뒤돌아볼 엄두를 못 내다가 1970년대 이후 나라 살림에 숨통이 트이자, 일제에 의해 뒤틀린 과거의 건축환경, 특히 궁궐을 복원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그 출발점이 1983년 창경궁 복원이었다. 1990년부터 시작한 경복궁 복원은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광화문과 월대 복원 등을 마치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광복절이 있는 팔월에, 우리는 왜 조선 궁궐을 복원하는지 짚어본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조선 궁궐, 특히 경복궁을 복원하는 것은 서울의 근원을 복원하는 일이다.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의 설계자들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경복궁을 중심으로 왕조의 주요 시설을 배치했다. 광화문부터 근정전을 지나는 남북으로 뻗은 경복궁의 축을 남쪽으로 연장하여 육조거리를 만들고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하여 경복궁에서 남향하고 볼 때 왼편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을 두었다. 한양을 계획한 모든 기준이 경복궁이었으니 경복궁이 한양도성의 중심이자 근원이었다.

복원된 궁궐의 모습은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체감하는 기회를 준다. 옛 건축물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그와 관련된 과거를 배우는 훌륭한 방법이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채 남겨진 빈터와 그들이 여기저기 세워놓았던 시설물만 궁궐 마당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눈에는 500년이 넘는 조선의 역사보다는 36년 일제강점기의 과거만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조선의 역사적인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옛 건축물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궁궐의 모습을 보여주는 주요 전각의 복원이 필요하다.

궁궐 복원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높이는 것이다. 과거는 우리의 정체성에 필수적인 요소다. 어제의 나를 모르면 오늘의 나를 알 수 없다. 옛것은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개인 차원에서 우리는 각자의 기억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과거를 떠올리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국민이 함께 가지는 ‘집단 기억’이 국가의 과거를 규정한다. 국가는 다양한 세대의 수많은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집단 기억’이 가리키는 대로 과거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기억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어서 과거와 현재가 함께한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끈으로써 사회의 연속성과 우리의 정체성에 필수적이다. 개인의 기억이 직접 경험으로 형성되는 ‘실상’인 것과 달리, 국민의 ‘집단 기억’은 앞선 세대로부터 배운 ‘개념적인 허상’이어서 물질적 실체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이때, 가장 유효한 수단이 집단 기억과 연관시킬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궁궐 복원은 한국인의 ‘집단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적 실체를 만드는 일이다. 일제가 조선 궁궐을 훼손한 것은 조선인의 ‘집단 기억’의 물질적 실체를 없애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궁궐 복원은 국가 발전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한국의 발전은 정치 안정과 경제 성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은 1980년대 중반까지 독재와 군사 반란으로 정치 불안을 겪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의 지속적인 갈망과 저항으로 1988년 이후 자유로운 선거로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1962년 120달러였던 한국인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021년 3만5110달러로 가파르게 성장했다. 정치 발전과 경제 성장에 따른 자신감으로 우리는 미래를 향한 또 한 번의 도약을 위해 일제에 의해 왜곡된 과거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궁궐 복원은 한국 관광 산업의 인프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1981년 100만명 남짓했던 외국인 방문자가 2019년에는 1700만명을 넘을 만큼 한국의 관광 산업은 경제 성장과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문화유산 관광은 오늘날 관광 산업에서 핵심이다. 문화유산 관광이 중요해짐에 따라 한국의 역사를 보고 배울 수 있는 관광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한국 관광에서 서울은 핵심 지역이고 궁궐은 서울의 역사적 근원이다.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관광 산업을 위해서라도 궁궐 복원은 필요하다.

궁궐 복원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조선이 멸망한 지 한 세기가 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궁궐에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경제 성장으로 부동산 개발 압력이 비등했을 때도 궁궐은 예외였다. 일제가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고 그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격하한 것을 우리는 궁궐의 존엄성을 훼손한 것이며 그것은 곧 한국인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이라 여겼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야당 의원이었던 시절, 일본 국회의원이 자신의 집에 총독부 건물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걸어놓은 것을 목격하고 상당한 모멸감과 치욕을 느꼈다고 했다.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고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경복궁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은 바로 손상된 한국인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상처 입은 피부에 상흔이 남듯 일본에 유린당한 과거 또한 우리 사회에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강도에게 폭행당해 망가진 얼굴을 성형수술로 치유하듯 일제에 의해 왜곡된 과거를 바로잡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과거를 만들어 가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책무다. 매 시대 역사가가 역사를 새롭게 쓰듯 우리는 이 시대의 가치관과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바람직한 과거를 창조할 권리가 있다. 없었던 것을 그럴듯하게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과거의 흔적 중 현재와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것을 앞으로 드러낼 뿐이다. 조선 궁궐을 짓밟았던 36년 일본 제국주의의 흔적을 들어내고 500년 넘게 꽃피웠던 조선 궁궐을 복원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의 정당한 권리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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