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무비홀릭]‘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2024. 8. 26.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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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사지선다형 문제 나가요. 다음 중 허진호 감독의 멜로 영화 ‘봄날은 간다’(2001년)에서 핵심적인 대사 딱 하나를 고른다면? ①라면 먹을래요? ②떠나가는 버스랑 여자는 붙잡는 게 아니란다 ③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④아저씨, 강릉! 정답은 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③이에요. 사랑의 영원성을 믿는 경험 없는 남자(유지태)는, 사랑의 유한성을 아는 경험 많은 여자(이영애)의 이별 통보 앞에 이런 지질한 질문을 자문자답처럼 던지지요. 사랑은 변한다. 변하니까 사랑이다. 사랑은 미완성됨으로써 마침내 완성된다! 이것이 허진호 세계를 관통하는 사랑의 정의예요. 허진호는 영화 속 남자와 여자의 직업 속에 둘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리란 복선을 진즉에 깔아놨어요. 남자는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음향 기사이고, 여자는 지방방송국의 라디오 PD니까요. 남자는 소리를 ‘모으는’ 반면 여자는 전파를 통해 소리를 ‘퍼뜨리는’ 일을 하니, 둘은 시작부터 엇갈리고 말 운명이지요.

세상 모든 건 변해요. 변한다는 말 빼고 변하지 않는 건 없어요. 그래서 세상엔 없는 영원한 사랑을 우린 더욱 갈망하고, 그 과정에서 예술과 철학이 탄생하지요. KBS 주말 드라마 소재로 ‘기억상실’이 토할 만큼 자주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예요. 기억이 소실되어 ‘겉’은 같지만 ‘속’은 다른 인간으로 변할지라도, 심장에 한번 각인된 사랑은 뇌를 뛰어넘어 영원히 지속된다는 헛소리를 하고픈 거죠.

홍상수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사랑은 변할까? 영화제작전원사 제공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년)는 제목부터가 예술임을 깨닫게 되어요.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맞다’가 될 수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가 될 수도,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가 될 수도 있는 것이 변화무쌍한 세상사인 만큼, 차라리 띄어쓰기 없이 딱 붙여 놓은 제목을 통해 ‘조변석개하는 게 사랑이지만 그래도 변치 않는 사랑의 무엇’을 실낱같은 희망처럼 찾아보려 한 것은 아닐까 말이에요(홍상수는 “제목 글자가 많아서 붙여 쓴 것”이라고만 했음). 이 영화는 똑같아 보이지만 미묘하게 다른 이야기가 1, 2부로 나뉘어 전개되어요. 유부남 영화감독(정재영)이 미혼의 미녀 화가(김민희)와 우연히 마주친 뒤 여자를 꾀어보려 무진 애를 쓴다는 내용은 1, 2부 동일하게 반복되어요. 하지만 1부는 유부남이란 정체가 결국 들통나면서 당황한 감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러팅을 계속한다는 내용이고, 2부는 감독 스스로 유부남이란 사실을 먼저 밝힘으로써 여자의 묘한 신뢰와 동정심을 이끌어 내는 방식으로 유혹한다는 내용이지요. 아니, 1부나 2부나 늙은 영화감독이 발정 난 똥개처럼 군다는 사실은 똑같은데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사자후를 토해내실 수도 있지만, 둘은 분명 달라요. 유부남임이 자신의 의도와 달리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작업을 계속 거는 것(이것은 일종의 ‘위기관리·Crisis Management’라고 볼 수 있어요)과, 스스로 유부남임을 선제적으로 자백하는 방식을 통해 작업 효과를 높이는 것(이것은 일종의 ‘위험감행·Risk Taking’이라고 볼 수 있어요)은 차이가 있으니까요. 맞아요. 이런 반복과 차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의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본질이라는 것이 홍상수의 믿음이지요.

아, 사랑의 완벽한 불완전함이여! 사랑의 숨 막히게 아름다운 불안함이여! 그래서 스웨덴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위대한 영화 ‘제7의 봉인’(1957년)에도 이런 대사가 등장하나 보아요. “세상은 불완전한 것, 불완전한 것, 불완전한 것들로 가득해. 이 불완전한 것들 중 완전한 것이 사랑일세.”

정말 그래요. 속죄와 구원, 순간과 영원이라는 베리만의 화두를 여전히 치열하게 탐구하는 박찬욱도 ‘헤어질 결심’(2022년)을 통해 비극성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임을 말해주었어요. 남자 형사(박해일)를 사랑하는 여자 피의자(탕웨이), 그러나 의심과 관심 사이를 도돌이표처럼 오가다 종국엔 사랑을 포기해 버리는 남자가 이야기의 핵심이지요. 결국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결코 사랑할 수 없는(아니 사랑해선 안 되는) 남자의 딜레마를 해결하고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비극을 택해요. 밀물이 들어오는 해변 모래사장에 무덤 같은 구덩이를 판 여자는 그 안에 자신을 스스로 ‘봉인’해 버림으로써 사랑의 영원성을 기어이 획득하고 말지요. 불완전한 사랑을 완전하게 만드는 건 오직 죽음뿐이니까요.

아, 그래도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저는 믿고 싶어요. 그래야 살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마침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도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따져 묻는 유지태에게 이렇게 돌려주잖아요? “사랑은 변하지 않아. 단지 사람의 마음이 변할 뿐이지.” 맞아요. 사랑도, 법도, 원칙도, 상식도 변하지 않아요. 다만 사람의 마음이 변할 뿐.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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