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돌봄이 절실한 지금, 달라붙는 감정들
연이은 폭염에 온열질환으로 인한 안타까운 사망 소식이 끊이질 않는다. 수일 전 경기 부천의 한 아파트에선 폭염주의보에 에어컨 없이 지내던 91세 남성이 42도까지 체온이 오른 채 사망에 이르렀다. 병원에선 열사병과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한 사망으로 추정했다. 그의 죽음에는 세 가지 요인(폭염, 코로나19, 고령)이 중첩되어 있었다. 모두 다 사회가 돌봐야 할 커다란 주제들이며, 단 하나의 요인으로도 치명적이다. 혹시 고령이었기 때문에 폭염도, 코로나19 감염도 피할 수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위기가 시작된 것일까.
해당 지역에서 요양병원을 운영하는 의사는 8월 들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코로나 치료제가 들어왔냐’며 약국에 전화를 돌린다고 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지난 7월 3주차 226명이었던 코로나19 입원환자 수는 8월 2주차 1357명까지 한 달 사이에 6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코로나19 치료제가 부족하고, 상급종합병원 전공의의 부족으로 인해 원활한 진료에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질병관리청이 이번주까지 치료제를 조기 확보해 공급 일정을 앞당기겠다고 밝힌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개학한 초·중·고는 물론 대학까지 개학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코로나19 재확산에 대한 우려는 커져만 가고 있다.
이 같은 우려 속에 일상의 시민들에게 ‘달라붙는 감정들’은 무엇일까. 고령의 부모님과 개학과 함께 학교에 간 자녀들이 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기만을, 제발 우리 가족만은 아니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 이러한 불안감과 긴장은 전혀 근거 없는 감정이 아니다. 지난 24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선 의대 증원 문제로 촉발된 ‘지역의료의 붕괴’를 지적하는 의료기관 종사자 200명의 집회가 있었다. 지역의 응급실이 차례로 폐업하는 현실 앞에서 지방정부도 민간병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말 그대로 ‘돌봄의 총체적 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돌봄은 2022년 대선 및 지방선거 당시 돌봄 국가책임제에서부터 돌봄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매우 중요한 이슈였다. 그렇지만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확산되던 시기에 ‘돌봄’이라는 개념은 이토록 뜨거운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당시 한국여성민우회에서 2020년 2월부터 8월까지 주요 언론사 기사를 분석한 결과 돌봄위기를 심층분석한 기사는 1.05%에 불과했고, 경기회복, 고용 등과 같은 경제기사가 주요했다. 즉, 누가 돌봄의 위기 앞에서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그래서 사회적 돌봄이 어디까지 필요한지 논의가 턱없이 부족했었다. 이것은 돌봄의 위기와 함께 ‘돌봄의 부정의’ 문제였다.
물론, 돌봄에 대한 문제가 문제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문제의 해결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돌봄의 사각지대는 존재하며, 그 불안과 긴장감은 사회적·경제적 지위 및 건강 및 연령 수준에 따라, 나아가 성별에 따라 불균등하게 부과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 같은 돌봄의 위기와 부정의를 일선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이들이 바로 콜센터 상담사다. 얼마 전 만난 국가권익위 산하의 상담사들은 개학 후 다가올 코로나19 팬데믹 재확산과 관련된 문의 전화에 벌써부터 두려움이 앞선다고 했다. 또한 120다산콜재단의 자료에 의하면, 올해 상반기 ‘돌봄, 복지, 정신건강’ 관련 상담내용 중 1위(34%)가 독거 및 거동불편자에 대한 활동지원, 2위(25%)가 긴급복지에 대한 문의, 3위(19%) 및 4위(12%)는 각각 심리상담 및 우울증·자살·정신질환에 대한 문의였다.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어떠한 아픔 속에서 공적인 돌봄의 손길을 요구하고 있는지 상담내용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최전선의 상담사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돌봄의 위기 앞 무방비 상태였다. 상담사처럼 일선에선 돌봄의 위기를 감지하고 그 빈틈을 채우려 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해 왔다. 그렇지만 그러한 역할은 본능 혹은 태생적으로 특정 연령, 성별, 지위, 계급의 사람에게‘만’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
평화학 연구자인 정희진(여성학 박사)은 심리학자 캐럴 길리건의 ‘보살핌 윤리학’을 기존 사회규범에 추가함으로써(대체가 아니다!) 규범의 다양화를 숙고해야 하며, 나아가 돌봄을 누가 잘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보살핌 윤리를 공적인 윤리로 포함시켜야 함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먼저 떨쳐내야 할 감정 혹은 통념이 있다. 그것은 돌봄이 ‘의존’과 동의어가 아니며, ‘자립’의 반대말도 아니라는 것이다. 돌봄은 ‘기꺼이’ 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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