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의 풀뿌리]누구를 위하여 경보는 울리나
지난 목요일 몇년 만에 서울 광화문에 들렀다. 민방위훈련이 시작될 쯤에 도착해서 지하철 안에서부터 공습경보방송이 들렸다. 방송의 목소리는 사뭇 심각했지만 그걸 듣는 시민들의 표정은 무심했고, 사람들 이동을 통제하던 이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20분간의 훈련이 끝난 뒤 시민과 공무원 모두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
지상으로 나가 둘러본 광화문의 모습도 비슷했다. 서명을 받고 기자회견을 열던 이순신 장군 동상 근처는 분수대로 바뀌었고, 그 공간은 광장이란 의미를 잃어버린 듯했다. 역사는 지워지고 사이렌 소리가 귀에 남으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공안정국과 정계개편
취임 이후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공산주의, 좌파, 반자유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지난 8월19일 을지 및 제36회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고 북한이 개전 초기부터 이들을 동원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니 혼란과 분열을 차단하고 전 국민의 항전 의지를 높일 방안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발언은 과거의 공안정국을 연상케 한다.
1989년 5월에 시작된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도 체제전복세력의 선동으로 나라의 안정이 흔들리고 있으니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법질서를 확립할 것이라는 국무회의 발언에서 시작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공안정국은 “집권세력 내지 정부가 정치적 반대세력 탄압을 위하여 사회질서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한 것처럼 과장하여 조성한 보수적 국면의 정치”를 뜻한다. 안전기획부는 국내에 북한을 따르는 좌경조직 소속원이 1만명 이상이라고 발표했고, 노태우 정권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용공’으로 몰아 탄압하고 1989년에만 시민 1515명을 구속시켰다. 그와 동시에 국회의 여소야대 상황을 뒤엎을 정계개편을 공작해서 1990년 1월에 민주자유당(민자당)이라는 거대정당을 탄생시켰다.
한국 정치에서 공안정국은 중요한 사회의제를 은폐하고 저항을 억누르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치흐름을 바꾸는 도구였다. 취임 초부터 20~30%의 지지층만을 기반으로 삼았던 윤석열 정부도 결국에는 정권 재창출을 통한 안전한 퇴임을 고민할 것이다. 대통령을 둘러싼 의혹과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늘어나기만 하는 지금 상황이라면 그 압박감은 계속 커질 것이다. 지난 총선 패배 이후에도 야당과 대화나 협력을 하기는커녕 부적절한 인물들이 계속 장관이나 기관장에 임명되는 것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초조함의 반영 아닐까.
내치만큼 불안한 외치
물론 지금의 정치상황은 노태우 정권 때와 매우 다르지만 당시 민자당 합당이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한 합당(김영삼과 김대중의 저항으로 무산되었지만)이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방향성이 있다. 그리고 상속·증여세나 종합부동산세, 금융투자소득세를 낮추자는 방향으로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우회하는 것도 대통령선거 패배 이후 확장을 모색하던 평화민주당의 모습과 닮았다. 아직은 정부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지만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을 부활시키겠다는 국민의힘의 입장은 걱정스럽다.
그나마 노태우 정권 당시의 국제정세는 국내 정치의 재편에 유리했다. 북방외교를 추진하며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했고, 1990년 한·소 수교, 1991년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1992년 한·중 수교 등의 성과를 거뒀다. 그렇지만 냉전의 붕괴와 외치의 화해모드가 내치의 긴장을 누그러뜨렸는데도 1991년 5월 많은 희생을 치르게 한 분신정국은 피하지 못했다.
하물며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매우 다르다. 한국과 러시아, 중국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고, 한·미·일 동맹과 북·중·러 동맹의 대립 또한 심각해지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중동의 내전은 지난 6월의 북·러 조약, 기후위기, 에너지 수급, 심각한 물가, 대화가 단절된 남북한의 긴장 등을 고려할 때 나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외치의 위태로움이 내치의 긴장을 더욱더 끌어올리면 우리는 더 큰 비극을 경험할지 모른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시민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정부는 공습경보를 울리며 무의미한 시간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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