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원 칼럼] 웅변이 사라진 한국 정치

김희원 2024. 8. 26.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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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민주주의 웅변하는 미 민주당
원칙은 없고 저열한 언어만 남은 한국
보편 가치로 지지 호소할 수 있어야
지난 20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가 연단에 올라 연설을 했다. 이들은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언급하며 카멀라 해리스 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연합뉴스

남의 나라 전당대회가 부러울 줄 몰랐다. 조 바이든 대통령에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으로 대선 후보를 바꿔 뜨겁게 달아오른 미국 민주당 말이다. 전직 대통령들이 수감되지 않고 환호 속에 연설하고, 그 배우자들은 더 인기가 높은 게 이렇게나 대단한 일이었다. 총기 난사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나와 “행동하는 후보를 뽑자”고 외치는 장면에선 울컥했다. “죽음을 정쟁에 이용하지 말라”는 비난이 없어 또 부럽다. 경탄한 것은 연단에서 울려 퍼진 민주주의와 자유와 국가의 가치였다. 당연한 원칙들이 당원을 설득하고 투표를 독려하는 힘이라는 사실에 감동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많은 발언과 행동이 감동적이었지만 한 대목만 인용한다. “나는 나에게 투표했는지에 관계없이 모든 미국인을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했다. 연구를 보면 우리가 통과시킨 법안들이 실제로 파란색(민주당) 주보다 붉은색(공화당) 주에 더 많은 혜택을 주었다.” 전당대회에서 상대 당 지지 지역을 더 많이 지원했다는 걸 성과로 말하다니, 그러고도 당원들에게 박수를 받는다니.

그들은 누구를 대변하는지도 명확히 했다. 바이든은 “나를 가장 노조 친화적 대통령이라고 하는데, 자랑스럽게 인정한다”고 했다. 식당에서 일하다가 하원의원이 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는 “공화당은 내가 의회에 들어온 첫날부터 ‘바텐더로 돌아가라’고 했다. 언제든 기쁘게 돌아갈 수 있다. 생계를 위한 노동은 전혀 잘못이 없으니까”라고 일침하고는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팀 월즈 부통령 후보는 “민주당이 말하는 자유는 진료받을 결정을 내릴 자유, 아이들이 복도에서 총에 맞지 않고 학교에 갈 자유를 말한다”며 재생산권과 총기 규제 의제를 강조했다. 민주당이 노동자, 중산층, 이민자, 여성, 성소수자의 대변자라는 걸 얼버무리지 않았다. 더 보편적 가치로 확장시켰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진짜 자유는 우리 삶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이자 “다른 사람들도 자기 식으로 선택할 권리가 있고 그래도 괜찮다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게 미국의 핵심 가치이자 민주당의 비전이라고 했다.

그럴듯한 수사(修辭), 립서비스일 뿐이라고 폄하하거나 원칙보다 승리가 중요하다고 조롱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원칙이 실종된 게 우리 정치의 문제라는 걸 보지 못하는 이들이다. 정치 리더들이 원칙을 말할 자격, 수사를 동원할 능력이 있기나 하면 다행이다. 논란의 공천으로 경쟁자를 제거하고 85% 몰표로 당대표에 연임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민주주의를 말한다 한들 누구에게 설득력이 있으랴. 이 대표는 기본소득, 성평등, 정치개혁 등에 대해 말을 흐리고 뒤집고 부정하며 스스로 원칙과 가치를 허물었다. 기본사회를 당 강령에 넣고 부자감세에 호응하면서 민주당이 누구를 대변하는지는 점점 모호하다. 얼토당토않은 검사 탄핵을 보면 확실한 건 이 대표를 대변한다는 점이다.

여권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대통령은 법치와 공정을 배신하고 분열적 언어로 치닫더니 광복절 경축사마저 “가짜 뉴스에 기반한 허위 선동과 사이비 논리는 자유 사회를 교란시키는 무서운 흉기”라며 편가르기에 여념이 없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당대표 수락연설에서 민심에 더 반응해 외연을 확장하겠다고 밝혔지만 민심이 주목하는 디올백 수수 무혐의 처분에 하나마나 한 반응뿐이다. 뉴라이트 독립기념관장, 차별금지법 반대 인권위원장 등 기이한 인사에도 말을 아낀다. “폭풍이 되어 여러분을 이끌겠다”더니 폭풍은커녕 바람 한 점 없다.

미국 대선은 물론 말의 향연이다. 중요한 건 말의 힘이다. 정치인의 말에서 진심을 느낄 때 사람들은 결집하고 공동체가 움직이며 국가가 작동한다. 정치의 언어는 자기실현적이다.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의 연설은 이렇다. “사람에게 충성하기보다 헌법에 충성하기를 선택하자. 그것이 미국의 가장 좋은 점이기 때문이다. (…) 진실을, 명예를, 기쁨을, 그 무엇보다 자유를 선택하자. 그것이 미국의 가장 좋은 점이기 때문이다.” 누가 한국의 위대함으로 지지를 호소할 것인가. ‘수박’ 사냥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노조를 적대시하거나 소수자를 혐오하는 건 잘못이라고 말하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 지당한 가치를 지당하게 만드는 웅변의 정치가 필요하다.

김희원 뉴스스탠다드실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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