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의 정치사기] 사후약방문식 화재 대처

김세희 2024. 8. 26.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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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희 정치정책부 기자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23일 오후 전날 발생한 화재로 7명이 숨지고 12명이 다친 경기도 부천시의 한 호텔을 방문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연합뉴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죽은 뒤에 약방문(藥方文)을 쓴다는 의미다. 약방문은 약을 짓기 위해 약의 이름과 분량을 쓰는 종이다. 이미 때가 지난 후 대책을 세우거나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사후약방문의 사례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한 번 사고가 나면 겉잡을 수 없는 참사를 불러일으키는 화재가 그렇다. 위정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전근대시대 성군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들도 화재 대응책을 미리부터 마련하긴 쉽지 않았다.

1051년(고려 문종 5년) 2월 12일, 도시 상점인 시전을 관리하는 경시서에 화재가 나서 인근에 있는 집 120호가 불에 탔다. 문종은 관리에게 지시해 목재와 기와를 지급하게 했다.

1주일 뒤인 19일에도 경자 백령진의 성랑 28칸과 민가 78호가 불에 탔다. 성곽을 지키던 관리가 부주의했기 때문이다. 안찰부사 상서병부원외랑 유숙이 아뢰길 "진장 최성도와 부장 최숭망 등이 근신하지 않아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현직을 삭제하고 죄를 내리기를 청합니다"고 말했다. 문종은 즉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화재가 발생하면 관리 책임을 추궁하는 식의 반복이었다. 급기야 15년 뒤(1066년)에는 공물을 보관하는 창고인 운흥창에 불이 났다. 그제야 문종은 제도 개편에 들어갔다. 그는 제서를 내려 "운흥창의 화재는 관리가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축적한 곡식을 하룻밤 뜻밖의 재화로 태워버렸으니 가히 원통하지 않겠는가. 이 후로는 모든 창름과 부고에 화재를 방지하는 관리를 별도로 두고, 어사대가 때때로 점검하되 일직을 빼먹는 자는 관품의 고하를 논하지 않고 먼저 구금한 뒤에 알리라"고 했다.

정치·문화·경제·국방 전 분야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세종도 유독 화재를 미리 대비하긴 어려웠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세종 관련 기사를 찾아보면 화재 사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특히 이 시기에는 각 관아에서 관리하고 있는 화재가 빈번했다. 결국 호조에서 대책을 제시했다.

"경외 각처 창고가 여러 번 화재로 인해 연소되는 폐단이 있습니다. 그 창고를 5, 6영의 간격을 두고 담을 싸서, 불기운이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옥상에도 두껍게 바르고 기와로 덮고, 또한 처마 밑에 돌아가면서 담을 쌓아, 그 높이가 처마까지 닿도록 하여 화재를 방지하소서." 세종은 그대로 따랐다.

병조에서는 예방책까지 제시했다. 이를 금화조건(禁火條件)이라 하는데, 한성에서 화재가 날 경우 각 군대와 관리들이 진화에 대한 역할을 분담한 것이다. 그러나 화재는 줄지 않았다. 이후에도 도성 안과 농지, 국고, 절에 불이 빈번하게 났다. 담당 관리의 재배치만으로는 크게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세종은 수 차례 화재를 겪고 난 이후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그는 재위 8년째인 1426년 2월 20일 서울의 각 상점에 방화장을 쌓고, 성내 도로를 넓히는 등 화재 방비책을 명했다. 세종은 "각 관청과 가까이 있는 가옥은 철거하고 행랑은 10간마다, 개인집은 5간마다 우물을 하나씩 파고, 각 관청안에는 우물을 두 개씩 파서 물을 저장하라"고 했다. 이어 "종묘와 대궐 안과 종루의 누문에는 불을 끄는 기계를 만들어서 비치하고, 군인과 노비가 있는 각 관청에도 모든 시설을 갖추라"며 "화재가 나면 각 소속 부하를 거느리고 가서 꺼야 한다"고 명했다. 6일 뒤에는 화재를 미연에 방지하는 일을 담당하는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했다.

600여년이 지난 현대 시대에도 화재를 미리부터 예방하긴 쉽지 않다. 지난 22일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중동에 있는 9층짜리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비어 있던 810호 객실 에어컨에서 튄 스파크가 에어컨 아래 비닐쇼파 등과 만나 화재로 번진 것으로 추정된다.

더 큰 문제는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숙박시설 화재가 매년 300건이 넘는데도, 대다수 숙박시설에는 스프링클러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관계 법령이 완벽히 정비되지 않은 탓이다. 스프링클러는 1981년 숙박시설의 11층 이상에만 설치하도록 첫 규정이 생겼고, 2005년 5월 관련법 개정으로 11층 이상 숙박시설 모든 층에 설치하도록 했다. 이후 2017년 법 개정으로 이듬해 6층 이상의 호텔·여관에 전체층 설치 의무가 적용됐으나 이전 시설은 소급 적용되진 않았다. 이번에 불이 난 부천호텔도 2004년 준공됐기 때문에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 대상이 아니었다. 이에 최근 일어난 화재에서 스프링클러가 있는 경우 화재 확산을 막은 사례가 많아 오래된 숙박업소에도 의무 설치 규정을 소급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여야 지도부 모두 화재 현장을 방문해 재발 방지책을 약속했다. 국회에서도 관련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미 지난 23일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스프링클러 신속 설치 의무화 소급 적용법'이 올라와있다. 법안은 숙박시설 등에 오는 2027년말까지 스프링클러를 신속하게 설치토록 규정하고 있다. 학교, 병원에도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를 더 강화하자는 법안도 7개나 발의된 상태다.

더 이상 여야 간 정쟁을 벌이느라 이런 민생 법안처리를 미루진 말길 바란다. 무엇보다 인간의 생사여부와 직결된 법이다. '얼마나 더 죽어야 대책을 마련하겠는가'라는 비난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정치정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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