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땅 네팔 여행③ 해발 4,200미터를 향한 마지막 여정

2024. 8. 2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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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의 푸르름은 영원하리

트레킹을 시작하고 절반이 지났다. 체력이 고갈될 것이란 애초 예상과 달리 몸과 마음에서 에너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체력적 한계는 없었다. 해발 4,200m에 달하는 오르막을 질주하는 동안 매 순간 순간이 개인의 최초 기록이자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것에서 순간을 즐길 줄 아는 태도를 잃고 싶지 않았으나, 트레킹 마지막 목적지에 닿았을 때는 밀려드는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해발 4,200미터에 위치한 마르디 히말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다본 마차푸차레와 히운출리 산봉우리, 위치와 방향을 알려주는 나무 표지판
매 순간이 최초의 기록이자 역사
3일 차 첫 번째 목적지인 로우 캠프(Low Camp)로 향하는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됐다. 약 2.3km 거리, 2~3시간가량 오르막을 올라야 하는 코스다. 오전시간을 온통 소비하면 해발 3,000m에 위치한 로우 캠프에 닿는다. 30여 분 걸었을까. 출발 장소인 레스트 캠프(Rest Camp)를 완전히 벗어난 지점, 정글 숲 한가운데 당당히 서 있는 나무 표지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에 새겨진 ‘로우 캠프’를 보는 순간 새 날 새 아침 그리고 또다시 펼쳐질 트레킹의 새로운 경험에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해발 3,000m를 넘어 하이 캠프(High Camp)가 위치한 해발 3,540m까지 도달하는 3일 차 트레킹. 하루 동안 가파른 오르막을 계속해서 올라야 하는 험준한 산행길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몸은 고되도 마음만큼은 즐길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행히 지난밤 어렵사리 샤워를 시도한 것이 컨디션 조절에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켰다.

로우 캠프로 가는 길, 로우 캠프 산장 풍경
수압이 약해 매우 가느다란 물줄기 아래서 샤워를 해야 했지만 그마저도 나머지 산행 일정 가운데 이것이 마지막 샤워였다. 해발이 높아질수록 산장 환경은 점점 퇴화하는 양상이다. 그렇기에 해발 3,500m에 위치한 셋째 날 밤을 보낼 숙소는 과연 어떤 환경을 갖추고 있을지 기대가 높아질 수밖에.

로우 캠프에 도착해 이곳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려 했지만 잠깐의 휴식 후 일단 다시 가방을 들쳐 맸다. 하늘을 점차 뒤덮고 있는 구름 떼를 감안해 우선 빨리 이동하는 것이 낫다는 현지인 가이드의 판단에서였다. 다음 마을인 바달 단다(Badal Danda)까지는 약 1.6km 거리, 1~2시간가량 더 산행을 이어갔다.

바달 단다에 도착한 뒤에도 이곳 산장들 가운데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지점까지 그야말로 가파른 오르막을 끝도 없이 올라야 했다. 그 끝에 이르러 마침내 꼭대기 산장에 도달했다. 마을 전체를 굽어살피는 풍경에 압도당하고서야 진정한 자유가 심신을 에워쌌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오르막에도 반드시 끝이 있다. 오르고 또 오르면 그 끝에서 맛보는 자유는 온전히 오르막을 오른 자의 것이 된다.

해발 3,540m에 위치한 마지막 산장 마을, 해발 3,286m에 위치한 바달 단다 마을
마지막 산장, 하이 캠프에 닿다
하늘이 또 한번 우리 편에 섰다. 가쁜 숨을 내쉬며 꼭대기 산장에 도착한 지 불과 몇 분 만에 까맣게 드리운 구름 사이로 세찬 소낙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산장 지붕이 부서질 듯 내리치는 빗줄기의 위력은 주변의 소음을 단번에 뒤덮으며 오직 빗소리에 집중하게 했다. 산장의 식당 창 밖 너머로 보였던 초록빛 마을 풍경은 빠른 속도로 구름과 비로 가려져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형국이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식당 주인이 정성스레 차려준 음식을 뱃속에 차곡차곡 넣었다.

다행히 큰 소낙비는 피했지만 가늘어진 빗줄기가 좀체 잦아들지 않는 상황, 무턱대고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판단 하에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트레킹 시작한 지 3일 만에 처음으로 비를 맞으며 산길을 걷는다. 바달 단다에서 이날의 마지막 목적지 하이 캠프까지는 약 3km 거리, 2~3시간가량 오르막을 또 오른다.

하이 캠프 산장에서의 저녁식사
외국인 여행자 셋과 네팔 현지인 셋으로 구성된 우리의 트레킹 팀. 비가 내려 질퍽한 미끄러운 산길을 오르는 동안 체력이 고갈되고 극한의 상황에 치닫게 되자 자연스레 침묵을 택한 외국인 여행자들과 달리 현지인들 사이에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화가 끊이지 않는 모습이다.

이들 가운데 30kg에 달하는 짐 가방을 이마에 매단 채 이동하는 하리(Hari)가 가장 큰 목소리로 대화를 이끈다. 직업상 계절에 상관 없이 수십, 수백 번 산을 올라야 했던 이들의 대화를 오락가락하는 날씨나 높은 해발고도, 가파른 오르막 따위가 방해할 수 있을까. 침묵 속에서 빗소리와 함께 귓속을 간질이는 이들의 대화는 뜻하지 않은 평온함을 안겼다. 해발 3,500m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비를 맞으며 하이 캠프에 올랐다. 하이 캠프로 향하는 깎아지른 절벽 길(사진 아래).
하이 캠프는 마르디 히말 베이스캠프(Mardi Himal Basecamp)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마지막 산장 마을이다. 해발 3,540m에 10여 개의 산장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이곳에서 해발 6,000m가 넘는 안나푸르나 산봉우리인 마차푸차레(Machhapuchhre)와 히운출리(Hiunchuli) 전망이 가능하다.

지난밤과 마찬가지로 하이 캠프 산장에 도착한 후 커다란 구름 떼로 뒤덮인 하늘은 좀체 산봉우리의 등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구름이 살짝 걷혔다 다시 덮이기를 수차례, 구름과 여행자들 간에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승부가 진행되었다. 짧은 기다림 끝에 일몰 직전 마침내 구름이 한발 물러나면서 얼굴을 내보인 거대한 산봉우리가 3일 차의 대미를 장식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다본 마차푸차레와 히운출리 산봉우리, 마르디 히말 전망대로 가는 길
해발 4,200미터 전망대에 오르다
간밤 뒤척이다 어렵사리 잠에 들긴 했는데, 긴장한 탓인지 알람 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아직 모두가 잠든 칠흑 같이 깜깜한 새벽 4시, 추위에 맞서 중무장을 마치고 해발 4,000m가 넘는 고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마르디 히말 트레킹 코스의 하이라이트인 4일 차가 시작된 시점에서 아직까지 우리 일행 가운데 고산병의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 이른 새벽 산행에도 불구하고 일행 모두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 이 두 가지 긍정적인 기운이 최종 목적지까지 무탈하게 안착되기를 바랐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어둑어둑한 산길은 헤드 랜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은 불빛이 커다란 이정표 역할을 한다. 광활한 무대 위 오직 주인공만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조명처럼 이 거대한 산길 위에 여행자를 비춰주는 작고 소중한 불빛이 광명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깜깜한 배경 가운데 저 멀리 작은 점과 같은 불빛이 일렬로 오르막을 오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새벽 4시보다 더 일찍 출발해 앞장서 산행을 시작한 사람들, 그렇게 또 하나의 작지만 커다란 이정표가 우리의 발걸음을 비춘다.

해발 4,200미터에 위치한 마르디 히말 전망대. 같은 듯 다른 길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하이 캠프에서 출발해 마르디 히말 전망대까지 도달하는 것이 1차 목표. 약 2.5.km 거리, 해발 700m를 올라야 한다. 지난 3일간의 트레킹 동안 맞닥뜨린 오르막보다 더한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해발 높이가 4,000m에 가까워짐에 따라 자칫하면 고산병이 찾아올 수도 있는 상황.

이럴 때일수록 최대한 몸 상태를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떼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트레킹은 상대와의 경쟁이나 게임이 절대 아니다. 나의 속도, 나의 생각, 나의 경험이 하나둘 쌓이며 마침내 목표와 합일을 이루는 순간을 향유하는 것. 또 한번의 최고의 순간, 나만의 길은 그렇게 현실과 만났다.

결국 해발 4,200m 마르디 히말 전망대에 올랐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청명한 날씨를 배경으로 눈 덮인 산봉우리가 활짝 얼굴을 내보이며 여행자를 맞아주었고, ‘지구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히말라야산맥의 풍광은 새벽 산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기에 충분했다.

하산 과정에서 발견한 마르디 히말 표지판
최선의 길을 따라서, 이제부터 하산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최종 목적지는 전망대가 아닌 해발 4,520m에 위치한 베이스캠프까지였다. 전망대에서 약 3.6km 거리, 해발 3~400m를 올라야 베이스캠프에 닿을 수 있다. 이를 실현하려면 3~4시간가량 산행을 이어가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전망대까지 오르는데 만족해야 했다. 급변하는 날씨 탓에 베이스캠프까지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 현지인 가이드 사로지(Saroj)는 말했다. “만약 운이 좋게 비를 만나지 않고 베이스캠프까지 간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탁 트인 전망을 보기란 쉽지 않을 거예요.”

전망대에서 만난 다른 현지인들 또한 사로지와 같은 의견을 냈다. 이들의 판단에 따라 우리 일행은 모험 대신 하산을 택했다. 선택에 아쉬움은 없었다. ‘최선의 길’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트레킹은 최선의 길을 찾는 여정과 다름없다. 트레킹 시작 첫날부터 전망대에 두발 닿을 때까지 최선이 아닌 순간은 단 한번도 없었다. 최선을 다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일, 이보다 값진 트레킹의 결과물이 있을까.

같은 듯 다른 길을 따라 하산을 시작, 다시 하이 캠프 산장 마을에 닿았다.
하산은 참 쉽다. 나 자신과 싸워가며 힘겹게 올라온 길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 위에 다시 발자국 찍으며 내려간다. 타협점을 찾겠다고 나 자신과 싸우며 고군분투할 필요 없으니 심신에는 고요함만이 감돈다. 여기에 일행과 담소를 나누는 여유까지 부려가며 웃음이 번져간다. 여러 다양한 감정이 하나로 합쳐져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존재한다. 그것을 두 단어로 표현하자면 ‘평화’ 그리고 ‘평온’이다.

같은 길이지만 절대 같지 않은, 완전히 다른 길을 내려간다. 로우 캠프까지 해발 1,000m가량을 거침없이 내려가는 동안 그제서야 예상치 못한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트레킹의 마지막 날도 아닌데, 안나푸르나산과의 작별이 가슴 시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산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뒤로 멀어져 가는 산은 금세 흐릿하게 초점을 잃었고 그것이 못내 아쉬워 속도를 조절하며 걸어야 했다. 하산은 작별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그 과정에서 깨우쳤다. 작별에도 평화롭고 평온함이 깃들 수 있을까.

비포장도로의 시딩 마을 초입 전경, 비와 안개를 뚫고 나아간 마지막 산행
아쉬움과 기대가 뒤섞였던 마지막 산행

트레킹 여정의 마지막 날, 마지막 아침식사를 한다. 지난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침까지도 세차게 이어져 산장에 모여든 여행자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일단 바깥 상황에 대한 염려는 내려놓고 식사에 집중한다. 산장 식당의 나무 장작에서 피어 오른 불꽃이 온기를 뿜어내는 지금의 이 분위기를 아쉽지 않게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당장의 해야 할 일.

티베탄 브레드(Tibetan Bread)와 채소볶음, 삶은 달걀이 한 접시에 나오는 산장의 아침식사는 장소는 달라도 그 맛과 모양은 동일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디 히말 코스에 위치한 모든 산장은 ‘마르디 히말 투어리즘 매니지먼트 및 상인회’가 조직하고 설정한 매뉴얼에 따라 운영되기 때문이다. 어느 산장을 가더라도 음식 메뉴와 가격, 숙박비 등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티베탄 브레드와 채소볶음, 삶은 달걀이 한 접시에 나오는 산장의 아침식사
개인의 생각이나 이익보다 주민 전체, 나아가 안나푸르나산을 지키기 위한 모두의 움직임이 지속 가능한 트레킹으로 이어지는 것. 지난 5일간 지나쳤던 산길에서 본 쓰레기라곤 말이 남기고 간 배설물뿐, 작은 휴지조각 하나 찾을 수 없는 깨끗한 환경은 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주민들의 정성스런 보살핌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마지막 날의 트레킹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에 가까웠을 것이다. 로우 캠프에서 이날의 최종 목적지인 시딩(Sidhing) 마을까지 약 4km 거리, 내리막길이 대부분인 데다 날씨가 맑았다면 산행은 2시간 안팎 소요됐을 것이다. 하지만 비를 맞으며 걷는 길은 발의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었고, 굵은 빗줄기를 피하느라 여러 번 지붕 아래 몸을 숨겨야 했기에 소요시간은 늘어만 갔다. 장점도 물론 있었다. 정글 숲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산과 작별해야 하는 타이밍 또한 더디게 흘러갔기에.

비와 안개를 뚫고 나아간 마지막 산행
시딩 마을에서 포카라(Pokhara)까지는 4륜구동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다. 차가 다닐 수 있는 비포장도로가 마을 초입에 조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마르디 히말 코스의 마지막은 포카라가 아닌 시딩 마을로 인식되는 편이다. 짧았던 산속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문명도시로 간다.

자갈길 위를 달리는 차량의 덜컹거리는 움직임을 느끼며 떠나는 아쉬움과 새로운 목적지의 기대를 동시에 품는다. 문명도시에 가까워질수록 산을 떠난 아쉬움은 더 크게 번져갔고, 그 이유는 5일간의 산속 생활이 짧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매 순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자책 때문일까.

언젠가 반드시 안나푸르나를 다시 찾을 것이다. 다음을 기약하는 마음이 간절하기에 기쁨이 섞인 아쉬운 감정임이 분명하다. 안녕, 나의 안나푸르나.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4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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