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성을 신뢰한다”는 해리스의 그 말 [김영희 칼럼]
카멀라 해리스는 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에서 ‘유리천장’ 같은 단어는 단 한번도 쓰지 않았다. 70여일 남은 대선 결과 또한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정치가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고통과 권리에 귀 기울여야 하고 또 귀 기울일 수 있음을 시카고 전당대회는 보여줬다.
김영희| 편집인
“우리는 당신이 보여요.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요.”
우연히 유튜브 생중계를 켰을 때 마침 그의 발언 순서였다. 지난주 나흘간 미국 시카고 유나이티드센터에서 열린 미 민주당 전당대회 첫날, 황금시간대 무대에 오른 한 젊은 여성이 자신의 경험과 함께 이 말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한국 대통령 뽑는 것도 아닌데 웬 호들갑이냐 할지 모르지만, 국가나 이념의 문제를 떠나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를 환기해주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켄터키주 출신 대학생 해들리 듀발은 5살 때부터 양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성범죄를 당했다. 12살 땐 임신했다. 당시 ‘네겐 옵션이 있다’는 말을 가해자로부터 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보수적 연방대법관들에 의해 2022년 6월 여성들의 임신중지(낙태) 권리를 인정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이후, 지금 미국의 많은 여성에겐 그런 옵션조차 없다.
듀발은 연방대법원 판단이 나온 바로 다음날, 10년간 엄마에게마저 감췄던 임신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트럼프는 (임신중지 금지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아름답나요, 아이가 자기 아버지의 아기를 갖는 게.” 나흘 내내 흥분과 환호가 넘친 전당대회였지만, 그의 발언 때 만큼은 2만여 참석자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듯했다.
싱겁게 트럼프의 승리로 끝날 것 같던 미 대선은 최근 롤러코스터에 올라탔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민주당 후보로 나서며 특히 여성과 젊은층의 결집이 두드러진 덕이다. 그 배경 중 하나는 여성의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을 둘러싸고 지난 2년간 벌어진 치열한 ‘전쟁’이다. 연방대법원의 판결 이후 임신중지 금지를 강화한 주들이 늘었지만 주의회나 주정부 차원에서 이를 막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곳도 늘었다. 역풍을 우려한 트럼프 진영은 각 주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입장이지만, 재집권할 경우 국가적 차원의 임신중지 금지와 처벌 규정이 도입될 것이란 공포가 미국 내에선 상당하다. 이달 워싱턴포스트·에이비시(ABC)뉴스·입소스 공동조사에서 미국인의 4분의 1은 임신중지권이 표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답했다. 경제·국경문제·건강보험에 이어 네번째다.
한국은 어떤가. 2019년 형법의 이른바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판단을 내리면서, 법적으로 임신중지는 범죄가 아니게 됐다. 하지만 헌재가 대체법 마련 시한으로 정했던 2020년 말을 훌쩍 넘겨 3년 반이 흐르도록 논의가 방치되며, 여성들은 어디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몰라 지금 이 순간도 스스로 찾아 헤매야 한다. 안전성이 세계적으로 입증된 임신중지약 또한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수입이 무산됐다.
임신 36주차 여성이 임신중지 수술 브이로그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것은 내게도 큰 충격이었다. 보건복지부는 여성과 수술한 의료진을 살인죄 혐의로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그런데 이게 이렇게 끝낼 일인가. 처벌 문제에 대한 논란과 별개로, 정부든 국회든 난리가 나고 대안을 이젠 마련하자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정부와 정치권의 침묵은 기이하다.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직무유기에 대한 핑계로 보일 정도다.
‘여성’은 정치의 주요 의제에서 밀려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갈등을 부추기며 밀어붙이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여성가족부 폐지 문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총선 뒤 있었던 거대 양당의 당대표와 최고위원 선출 과정에서 여성 문제 현안을 정면으로 제기하는 후보는 보이지 않았다.
해리스는 후보 지명 수락연설에서 ‘유리천장’ 같은 단어는 단 한번도 쓰지 않았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이 “천장을 걷어내면 하늘만이 있을 뿐”이라며 첫 여성 미 대통령의 의미를 강조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외신들은 ‘엘리트 여성’의 이미지가 강했던 클린턴의 실패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해리스가 여성이나 비백인의 정체성보다 검사나 중재자로서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전략을 쓰고 있다고 분석한다. 현명한 전략이지만 아직 여성에 대한 벽이 높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70여일 남은 미국 대선 결과 또한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정치가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고통과 권리에 귀 기울여야 하고 또 귀 기울일 수 있음을 시카고 전당대회는 보여줬다.
해리스는 여성의 재생산권을 제한하려는 트럼프와 제이디(JD) 밴스 공화당 부통령 후보를 여성혐오론자나 성차별주의자라고 공격하는 대신 “그냥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 이슈를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구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말했다. “저들은 여성을 신뢰하지 않는 반면, 우리는 여성을 신뢰한다.” 이 얼마나 강력한 한마디인가.
편집인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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