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노석준의 메타버스 세상...평등과 행복의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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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석준 RPA 건축연구소 소장. 메타버스 및 가상현실 전문가. 고려대 겸임교수 역임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꿈꾼다. 기왕이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행복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은 상상으로 이어지고, 상상은 곧 유토피아라는 가상의 이상적인 사회를 탄생시켰다.
'유토피아'(utopia)의 개념은 1516년에 영국의 정치가이자 인문주의자인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처음 제안했다. 유토피아는 고대 그리스어 'u(없는)'와 'topos(땅·나라)'를 합친 '존재하지 않는 나라'와, 'eu(좋은)'와 'topos'를 합친 '행복한 나라'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그래서 유토피아는 일반적으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행복한 나라'로 해석된다.
토머스 모어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행복한 나라'를 '세상에 존재하는 행복한 나라'로 바꾸는 혁신적인 시도를 한다. 이 걸출한 천재는 '유토피아'를 통해 인류가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가상 국가와 도시를 제안했다. 그가 제안한 유토피아는 소수의 권력층을 위한 나라가 아닌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과 자유, 평등을 누리는 나라였다.
유토피아 상상이 아닌 현실로
16세기 유럽은 봉건 체제 아래서 군주와 귀족의 잔인한 횡포와 착취로 다수의 평민과 하층민이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토머스 모어는 평민과 하층민이 억압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고민했고, 그 결과 이상향의 국가인 유토피아를 창조했다.
토머스 모어의 저서 '유토피아'는 총 두 권으로 이뤄져 있다. 제1권은 16세기 유럽, 특히 영국의 부패한 절대왕정 정치와 사유재산제도의 폐해를 풍자하고 비판한다. 제2권은 유토피아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설명한다.
정치적인 공상을 이야기 형식으로 구성한 유토피아는 문학, 정치학, 법학, 철학, 윤리학의 성격을 모두 담고 있으며, 유토피아라는 이상향의 섬나라를 경험한 가상의 인물인 라파엘이 토머스 모어에게 이 섬나라를 설명한다. 당시 백성의 삶을 걱정하고 안타까워했던 토머스 모어는 백성의 경제적 기반을 착취하는 헨리 8세의 정치를 개혁의 대상으로 보고 이를 대체할 이상향의 나라로 유토피아를 제안한다.
모든 인간의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한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통해 극도로 평등한 국가 이론을 제시한다. 이 나라에는 54개의 도시가 존재하는데, 모두 같은 계획에 따라 건설됐기에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모든 도시 안의 집들도 구조가 똑같고, 집의 문은 항상 열려 있어 누구나 어디든 방문할 수 있다.
또, 전 국민이 함께 소유하고 함께 노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식사도 마을 회관에서 다 같이 하고 옷도 똑같은 것을 입는다.
물론 개인의 취향과 자유도 존중된다. 유토피아의 시민은 하루 6시간만 일하고 8시간은 잠을 잔다. 나머지 시간은 책을 읽거나 각자의 취미활동을 하고 원하는 교육도 자유롭게 받을 수 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모두가 바라고 상상하지만 차마 현실에서는 구현할 수 없었던 이상향의 사회를 문학 형식을 빌려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한 최초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문학작품을 넘어 정치·사회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저술할 당시의 봉건주의적 사회체제에서는 인간은 왕에서부터 평민과 농민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절대적 상하 구조로만 연결됐다.
이러한 현실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상 사회는 오직 일부 개인의 상상 속에만 존재했다. 자유와 평등은 물론이고 개인의 존엄성까지 무시되던 당시에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구현할 제도와 장치를 제안한 것은 정치·사회학적으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게다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제안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치, 사회, 종교, 지리, 건축 분야의 지식과 상상력을 총동원해, 모든 것이 유토피아라는 가상공간에서 실체화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그는 공동생활이 가능하도록 건축학적 측면에서 구체적인 공간을 제안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법과 규칙과 생활 규범도 매우 상세히 제안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단순히 하나의 가상적 제안으로 끝나지 않는다.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제안한 덕분에 이후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에게 이상적 유토피아 사회를 구상하는 데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됐다. 실제로 그가 책을 통해 제안한 유토피아의 아이디어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에서 건축물과 도시, 국가를 건설하고 정치와 경제, 사회적 제도를 설계할 때 중요한 기초 자료로 활용됐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현대 메타버스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통해 현실에 바탕을 둔 가상성을 창조하고 실제 현실로 구현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인 설계를 제안한 것은 현대의 유토피아적 가상공간의 개념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집중했던 기존의 가상 세계의 관점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현실 세계의 관계로 바꾸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과거의 모든 가상 세계와 공간은 천국, 지옥, 연옥과 같이 신과 인간의 관계로부터 창조되었다. 그런데 토머스 모어는 이러한 틀을 과감히 깨부수고 왕과 백성의 관계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의 현실적 관계를 다뤘다.
당시 지배층의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었던 평민의 삶은 매우 피폐하고 힘겨웠다. 이러한 현실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 토머스 모어는 이상적인 가상 세계인 유토피아를 만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정치·사회 시스템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을 구체적으로 창조해냈다.
유토피아를 통해 현실의 착취와 억압이 없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꾼 것이다. 현대 메타버스가 현실 속 인간의 삶에 집중하고, 심지어 현실 세계와 연계한 가상 세계를 추구하는 것과 일치한다.
무한의 스케일에서 측정이 가능한 인간의 스케일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이후 신과 인간의 관계가 아닌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집중한 만큼 가상공간의 무대나 스케일도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제시한 사후 세계인 지옥, 천국, 연옥은 광활한 대지와 지구 내부의 공간은 물론이고 신의 세계인 천상까지 묘사하면서 공간의 스케일은 거의 측정할 수 없는 관념적 수준이었다. 이에 비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작은 섬나라, 54개의 도시와 같이 구체적이고도 수치상으로 제안되면서 인간이 실제로 생활하는 도시의 스케일과 건축 공간의 스케일까지 바뀌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유토피아 이후 가상공간이 무한의 스케일에서 측정할 수 있는 인간 공간의 스케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토머스 모어의 가상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수천 년간 성경 속에서 내려오는 신화적 스토리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상 속 사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토머스 모어가 구상한 유토피아에서는 현실에서 실제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벌어진다. 즉,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모든 구성원이 행복하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미래의 가상 세계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유토피아에서는 가상의 인물인 라파엘이 토머스 모어와 대화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는 가상의 인물이 독자를 대신해 유토피아 공간을 체험한다는 점에서는 현재 등장하고 있는 버추얼 리얼리티나 메타버스의 접속 방식과 개념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상상의 스토리에서 현실의 스토리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가상공간의 관심과 무대의 흐름을 바꾼 역사상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유토피아라는 가상적 제안이 어떻게 실제 현실에 영향을 미쳐 새로운 실체가 탄생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기도 하다. 가상의 세계와 공간은 인간의 상상과 관념 속에서 지속해 창조되고 논의되다가 기술의 발달 등으로 어느 시점에는 현실 세계에서 실제 공간으로 구체화한다.
역사 이래로 끊임없이 이어져 온 인간의 다양한 가상성이 현실 세계의 발전과 진화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엔진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불어 현재 우리가 상상 하는 수많은 가상성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현실로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사상은 탄생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와 사회체제 안에서 꾸준히 연구돼왔다.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 제시해야 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메타버스도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인류의 이 상적 유토피아를 탄생시키려는 노력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정리 : 이세영·성도현 기자>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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