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에도 유통기한 있다고?... '절대방패' 소멸시효 뒤에 숨는 정부
헌재, 과거사 사건에 '장기 소멸시효' 배척
정부 유엔선 "존중"... 소송선 "시효 완성"
"이중적 태도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편집자주
좌익척결, 민간인 학살, 간첩조작, 고문치사… 독재정부와 군사정권이 지배하는 동안 이 나라에선 국가가 국민 위에 군림했습니다. 정부가 앞장서 기본권을 침해하고 인권을 고의로 외면한 권력 남용 사건이 많았습니다. 민주화 정부 이후 뒤늦게 국가가 과거 잘못을 인정하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려는 노력도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과오 자인’이 곧바로 사법부의 ‘국가배상 인정’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국가 폭력에 희생된 이들과 그 가족은 왜 국가와의 법정싸움에서 판판이 패소하고 있는 것인지,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의 구조적 한계와 정부의 고의적 면피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짚어봤습니다.
※국가의 폭력에 가족을 잃은 두 사람의 법정싸움 분투기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82017220000350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82017220000350)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뭔가 멋있게 들리지만, 사실 피해자 입장에선 매정하기 그지없는 법언(法諺)이다. 자기 권리를 '스스로 제때' 챙기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는 뜻인데, 이 개념이 가장 잘 반영된 제도가 바로 소멸시효다. 원칙적으로 '손해를 안 날로부터 3년'(단기) 또는 '불법행위 발생으로부터 10년'(장기)이 지나면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 다만 국가배상청구권은 국가재정법에 따라 장기 소멸시효가 5년이다.
이게 법적 안정성과 신속한 권리 행사를 위해 필요하다지만, 국가를 상대로 싸우는 개인에게 '권리의 유효기간'이 있다는 건 '법을 모르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말과 똑같다. 고문 후유증 탓에, 입에 풀칠하기 바빠, 엄혹한 시대라···.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이 뒤늦게 법원을 찾았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가장 흔한 사유가 바로 이 소멸시효다.
수십 년 만에 진실을 바로잡으려는 개인의 노력에, 피고인 국가가 실체적 사실에 대한 사과 대신 "원고의 청구권은 소멸됐다"는 딱딱한 반론으로 찬물을 끼얹는다. 소멸시효에 해당하느냐를 두고 형식요건 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정의는 지연되고 고령의 피해자는 세상을 떠난다. 헌법재판소가 2018년부터 국가를 상대로 한 재판에서 이 원칙에 대한 '예외'를 두면서 변화의 기류도 감지되지만, 국가배상 소송의 '가해자' 격인 국가의 태도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법무부는 지난해 8월 유엔 인권이사회에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가 장기 소멸시효로 인해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련 기관이 헌재·대법원 결정을 존중하도록 조치하고 있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에서 정부 측이 '소멸시효 완성' 항변을 하지 않도록 지휘하고 있다는 취지다.
법무부가 국제사회에 이런 지침을 밝힌 배경엔 2018년 헌재 결정이 있다. 6∙25전쟁 때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처럼, 장기간 권리를 행사할 수 없던 사정이 있는 사건까지 일률적으로 장기 소멸시효를 적용하는 건 부당하다는 게 헌재 결론이었다. 법원도 이를 존중해 최근 과거사 사건에선 단기 소멸시효(인지 시점부터 계산)만 따지는 것을 판례로 구축했다.
그러나 유엔에 밝혔던 것과 달리, 정부는 실제 소송에선 여전히 책임 문제에 인색하다. 본보가 확인한 판결문에 따르면, 전국 법원에 접수된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 중 △형제복지원 △삼청교육대 △선감학원 △제주 4∙3 등 재판에서 정부는 "장기 소멸시효가 완성돼 청구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납치∙수용∙가혹행위∙학살 발생일로부터 5년이 지나 소장이 접수된 것이 명백하니, 피해사실 여부를 따져볼 것도 없이 재판이 종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얘기다.
과거사 사건에서 발생일만 따지는 장기시효를 들먹이는 것은 '오래된 얘기니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무책임한 답변과 별로 다르지 않은 항변이다. 이런 항변에 참다못한 피해자가 소송을 내기도 했다. 녹화공작 사건 피해자인 박만규씨는 지난해 말 1심 판결에 항소하며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은 '2차가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일이 이어지다 보니 법원이 정부를 비판하는 일도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6부(부장 황순현)는 지난해 11월 박씨에게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하면서 "(국가가 설치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결정에 기초해 권리를 행사하는 원고들에게 국가가 새삼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며 배상을 거부하는 것은 권리남용에 해당돼 허용될 수 없다"고 질타했다.
국제기구엔 인권을 지키는 것처럼 포장하고, 국내 소송에선 깐깐하게 구는 정부는 재판 당사자에게조차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과거사 소송에서 장기 소멸시효 항변이 반복되는 것에 대한 입장'을 묻는 본보 질의에도 법무부는 "헌재 결정을 존중해 사안별로 신중하게 판단하고 있다"고 즉답을 피했다. 소멸시효 확대로 국가 상대 배상청구 자격이 확대되면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는 탓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과거사 사건을 여럿 대리한 적 있는 법률사무소 가득의 박혜원 변호사는 "헌재 결정과 대법원 판례가 나온 이후 법원은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서는 장기 소멸시효 항변을 배척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기계적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며 "피해 당사자들이 상처받는 것은 물론 재판 지연 부작용도 있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국가 측의 소멸시효 주장은 자제되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고 짚었다.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이근아 기자 ga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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