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역이 종착역입니다”...독일인 마르크스氏의 파란만장 ‘코리안 드림’

2024. 8. 2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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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가 기증한 카를 마르크스의 탄생 200주년 기념 동상이 2018년 5월 5일 고향인 독일 트리어 시에 세워져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게티이미지]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 이백 년 전 프로이센에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은 풍성한 수염을 길렀고 오래도록 남을 선언문을 런던에서 발표했다. 추종자들은 이십여년 후 파리의 일부를 점거하고 혁명을 선포했다. 바리케이드 안쪽 술집에서 한 철도공이 기분에 취해 몇 줄의 가사를 썼다. 혁명 정부는 백일이 되기 전 진압 당했지만 가사는 남았고 한 가구공이 멜로디를 붙였다.”

근래 가장 ‘핫’한 작가로 꼽을만한 김기태의 단편소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시작은 이렇다. 첫 문장의 ‘두 사람’은 주인공인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이며, 두번째 문장의 수염 덥수룩한 프로이센 태생 ‘두 사람’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다. 소설은 한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20대 청년이자 중학 동창인 진주와 니콜라이의 가난하고 신산한 삶을 그렸다. 그런데 왜 그 이야기의 시작이 마르크스일까. 이유야 어떻든, 소설 속에서 두 청춘을 이어준 인연의 ‘세계사적 기원’으로서 짐짓 거창하게 소개됐던 독일인 마르크스씨의 파란만장했던 ‘코리안 드림’은 이제 끝을 맞게 됐다. 사실상 파산신고이자 사망선고다. 서울대 경제학부는 오는 9월 2학기 마르크스경제학 관련 강의를 개설하지 않는다. 35년만의 폐강이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기원, 마르크스=소설 속 진주는 빈곤층 집안의 딸로 간신히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각종 ‘알바’를 전전하며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다. 니콜라이는 아직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러시아교포 4세대로,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다. 서울 동북부의 중학 졸업 후 서로 상관없이 각자의 삶을 살던 두 사람은 경기 동남부의 한 도시에서 우연히 재회해 서로의 고단하고도 남루하기만 한 삶을, 하나 둘씩 공유해간다.

소설은 두 사람의 인연을 200여년부터 시작되는 격동의 세계사까지 소환해 가며 설명한다. 황당한 일일 테지만 아예 말이 안 될 것도 없다. 니콜라이의 뿌리는 일제를 피해 연해주로 향한 조선인들 틈에 있었으니, 고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소련의 고려인 이주 정책에 따라서 중앙 아시아에 정착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따지자면 소련의 탄생 근거가 된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니, ‘소련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결혼하고 한국에서 애를 키운’ 부모 슬하 니콜라이의 삶이 프로이센 태생의 두 사람과 영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성인이 돼 다시 만난 진주와 니콜라이가 서로 보낸 메시지엔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기립하시오 당신도’라고 외치는 소녀의 만화체 ‘짤’(밈)이 있었다. 검색과 추천의 알고리즘은 두 사람을 국제 노동자연대 혹은 사회주의 찬가라고 할만한 ‘인터내셔널’이라는 노래로 안내한다. 소설 첫 머리에서 ‘(1871년 프랑스 파리 코뮌 혁명) 바리케이트 안쪽 술집에서 한 철도공이 기분에 취해 쓴 몇 줄의 가사’라고 소개된 것 말이다. ‘기립하시오 당신도’라는 문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예심판사 앞에 선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의 일부이며, 이 시는 인터내셔널을 기리는 작품이다. 두 사람의 삶이 다시 오래 전 세계사의 끝자락과 만나는 셈이다.

이처럼 세계사와 한국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문화·세태의 변화상을 냉소적으로 섞어가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게 이 소설의 특징인데 지금이라면 이 정도의 문장들도 추가될 수 있을지 모른다.

“진주와 니콜라이는 생활비를 아끼려 한 집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인터넷에서 발견한 인터내셔널을 들으며 이삿짐을 정리했다.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을 신봉한다는 대통령은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가치는 자유로서 광복은 자유를 향한 투쟁의 결실이며 자유가 박탈된 동토의 왕국, 빈곤과 기아로 고통받는 북녘땅으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대선 경쟁자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향해 ‘대법원에 노골적 마르크스주의자를 임명할 것’이라고 비난하며 ‘우리의 임무는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등을 이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주와 니콜라이는 의미없이 틀어놓은 TV에서 이런 뉴스들을 흘려들으며 ‘당대 중국 마르크스주의, 21세기 마르크스주의, 중화문화와 중국정신의 시대적 정수로 마르크스주의 중국화의 새로운 도약을 이뤄낸 시진핑의 나라’로부터 온 쇼핑몰에서 ‘최저가 상품’을 검색했다. 내달부터 서울대에선 마르크스경제학이 폐강된다고 한다.”

▶마르크스경제학, 담론의 수요-공급시장에서 퇴출되다=서울대 경제학부는 ‘정치경제학 입문’ ‘마르크스경제학’ ‘현대 마르크스경제학’ 강의를 올해 2학기부터 개설하지 않기로 했다. 들을 학생도, 수업할 교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격이 상품에 투하된 노동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던 마르크스경제학이 스스로 부정했던 자유경쟁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퇴출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35년간 이어온 서울대의 마르크스경제학 강의의 가장 큰 공헌자는 고(故) 김수행 교수와 고(故) 정운영 교수다. 민주화 운동이 절정이던 1980년대 후반, 서울대에선 비주류 경제학인 정치경제학 강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1989년 1학기에 런던대에서 마르크스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수행 교수가 부임해 강의가 개설됐다. 이전인 80년대 초반부터는 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마르크스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정운영 교수가 시간강사로 강의를 했다.

철저히 이론이자 학문 대상으로서의 마르크스경제학에 천착했던 김수행·정운영 교수는 현실 정치나 민주화운동과는 거리를 뒀으나, 강의의 명멸은 그럴 수 없었다. 1990년대 초반은 전성기였다. 두 교수의 강의는 ‘마르크스경제학’ ‘현대마르크스경제학’ ‘가치론’ ‘공황론’ 등의 제목을 달고 이뤄졌는데, 200~300명 이상이 들어가는 대형강의동에서의 수업은 매번 학생들로 꽉 찼다. 김 교수가 1990년 번역한 자본론 3권 역자 서문에서 “2학기에는 ‘현대마르크스경제학’의 수강생이 1000명을 넘어 추가시간을 강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썼을 정도다. 축제를 맞은 대학 교정에서 김 교수가 막걸리잔을 앞에 놓고 학생들과 어울리며 “나는 대한민국에서 최고 ‘생산력’을 가졌다”며 쌍둥이를 포함한 유복한 자녀 자랑을 하곤 했던 시절이었다. ‘생산력’은 ‘생산관계’와 함께 마르크스가 경제의 역사적 발전 단계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김 교수가 자신의 전공 내용을 빌어 던진 썰렁한 농담이었다. 강의실에서 수업 중 마음대로 흡연을 하게 했던 정 교수는 시위를 이유로 휴강을 요구하는 학생들에게 “(강의와 시위 중) 어느 곳에 참여할지는 학생 개인들의 실존적 결단의 문제”라며 수업을 그대로 진행하곤 했다. 지금이라면 보기 어려운 풍경이고, 얘깃거리도 고민거리도 되지 않는 일일 터이다.

서울대 마르크스경제학의 전성기는 동구권의 몰락과 소련의 해체, 대학 내 이데올로기 퇴조와 급속한 개인주의화와 함께 짧게 끝났다. 정 교수는 시간강사 규정에 관한 서울대 학칙 개정에 따라 13년간 이어오던 서울대 강의를 1994년을 끝으로 그만두게 된다. 그는 당시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한때 부흥회를 연상할 만큼 빽빽히 들어찼던 강의실은 이제 썰렁할 정도로 자리가 비고, 캠퍼스의 백가쟁명을 알리던 대자보의 치열한 언어도 빛을 잃었다”며 “‘공황론에서 배운 것은 취직 시험에 도움이 안되고, 고시에 출제되지 않을 뿐더러, 대학원 입학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한 학생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참으로 쓸데없는 강의를 했다는 민망한 마음과, 이런 과목을 가지고 잘도 배겨냈다는 대견한 감정이 함께 몰려왔다”고 했다.

김 교수는 2008년 2월 정년 퇴임할 때까지 20년간 학부와 대학원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을 가르쳤지만, 이후 서울대는 후임을 뽑지 않았고, 강의는 외부 강사를 초빙해 이뤄졌다. 수강생은 갈수록 줄었다. 2021년 2학기 93명이었던 정치경제학 입문 수강생은 지난해 1·2학기 각각 29명과 25명으로 줄었다. 마르크스경제학 수강생은 2021년 1학기 14명에서 지난해 2학기 4명으로 줄었다. 현대마르크스경제학 수강생은 2021년 2학기 13명에서 2022년 2학기 1명으로 줄었고, 지난해에는 강의를 없앴다.

카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었던 지난 2018년 5월, 그의 고향 독일 트리어시는 보행자 모습을 마르크스로 바꾼 신호등을 도로에 설치했다. [게티이미지]

▶‘깃발’ 아닌 ‘텍스트’로서의 마르크스경제학=마르크스는 1848년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선언’을 발표했고, 약 20년 후인 1867년 ‘자본론’ 제1권을 출간했다. 마르크스가 직접 발간까지 책임진 것은 1권 뿐이며, 2~3권은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유고를 모아 펴낸 것이다. 1권은 주로 ‘상품의 가치는 투하된 노동량(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노동가치론’과, 자본이 취하는 이윤의 원천은 노동이 생산과정에서 창조하는 잉여가치라는 ‘잉여가치론’을 설명한다. 2~3권은 자본끼리의 경쟁이 격해질수록 소유의 독점이 심화하고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한다는 가설을 증명하는 데 집중한다.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경제학은 ‘자본주의 자동붕괴론’이나 ‘노동자폭력혁명론’과는 거리를 둔, 상품의 가격결정원리와 불변·가변자본의 이윤기여도, 시장에서의 경쟁과 독점간 상관관계, 이윤율의 장기적 추세를 규명하려는 이론으로 볼 수 있다.

흔히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학자로는 ‘진화론’의 찰스 다윈, ‘실존주의’의 프리드리히 니체, ‘정신분석학’의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마르크스가 꼽힌다. 마르크스경제학은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와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의 데이비드 리카도 등 영국 고전경제학의 전통에 기반해 있으며, 독일 관념철학의 종합으로서 게오르크 헤겔의 변증법을 논리 전개의 주요 수단으로 삼고 있다. 주류 경제학이 변수와 모형의 수학적 방법에 의존하는 반면 마르크스경제학은 개념의 논리적 발전을 중시시한다.

최근 발간된 김기태의 단편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엔 표제작 말고도 ‘보편교양’이라는 작품도 있다. 이 소설은 고교에서 ‘고전읽기’를 담당하는 국어교사가 10여권의 독서 목록 중 ‘자본론’ 을 넣었다가 학부모에 항의 전화를 받고 내심 전전긍긍했으나, 마르크스 저작들에 큰 관심을 보였던 학생이 서울대에 합격하면서 오히려 박수를 받는다는 얘기를 담았다. 국어교사는 항의 학부모에 ‘자본론’ 도서 선정에 해명할 말을 준비하면서 “영국 공영방송의 설문에 따르면 지난 천 년간 가장 위대한 사상가 1위, 마르크스. 지난 천 년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 1위, ‘자본론’. 서울대학교 권장도서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경제’ ‘세계사’ ‘사회문화’ ‘윤리와 사상’ 과목의 교육부 인정 교과서에서도 지면을 할애하는, 전국연합학력평가 및 수능 연계 교재에도 지문으로 등장한 적이 있는 마르크스” 따위의 정보를 모은다. 그러나 항의 학부모는 국어교사의 해명도 전에 태도를 바꿔 사과의 전화를 먼저 했는데, 학생의 뒷날 해준 얘기는 이와 같았다.

“컨설턴트 선생님이 아버지께 전화드렸어요. 마르크스 전혀 문제없고 고전읽기 수업도 괜찮다고. ”

서울대에서 들을 학생도 강의할 교수도 없어 마르크스경제학이 폐강된다는 소식은 시대 변화의 당연한 결과일 수 있으나, 대학이 자격증이나 입사시험 준비를 위한 ‘취업학원’이나 ‘스펙의 생산공장’이 돼가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일면 씁쓸하다. 학문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거니와, 인류의 유산인 고전으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일이야말로 대학이 해야 할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더 그렇다. 정운영 교수는 서울대 시간강사직을 그만두면서 “혹시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 진리가 이긴다는 미련은 버려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유행하거나 지배하는 이론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진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대학은 백가쟁명의 담론이 경쟁하는 시장이 돼야 하지 않을까.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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