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88년생 ‘골프 황금세대’ 두 장면···‘36세 신지애’ 준우승 한 날, ‘36세 김인경’ 은퇴
대한민국 여자골프의 ‘황금세대’로 통하는 1988년생 중 아마도 가장 먼저 ‘은퇴’ 얘기를 꺼낸 건 신지애일 것이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20대 초반 앞으로 한 10년쯤 더 선수 생활을 한 뒤 은퇴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다. 당시 세계랭킹 1위였던 로레나 오초아가 갑자기 은퇴하면서 신지애가 ‘골프 여제’ 자리를 물려받았던 상황이라 더욱 은퇴란 단어가 화두가 됐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8년생 중 지금도 뜨거운 샷을 날리는 주인공이 신지애다.
26일(한국시간) 끝난 올해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AIG 위민스 오픈에서 신지애는 공동 2위를 차지했다. 최종일 단독선두로 시작해 우승 경쟁을 벌였지만 결국 리디아 고에게 우승컵을 내줘야 했다. ‘골프의 성지’로 불리는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 벌어진 대회라 더욱 우승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리디아 고의 상승세를 넘지는 못했다. 이날 2오버파 74타를 친 신지애는 세계 1위 넬리 코르다, 세계 2위 릴리아 부, 그리고 세계 6위 인뤄닝과 공동 2위(5언더파 283타)로 대회를 마쳤다. 리디아 고의 우승 스코어는 7언더파 281타였다.
신지애가 다시 ‘제 2전성기’를 누리는 비결은 특별한 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꾸준한 연습과 시간을 더 늘린 체력 훈련이 골프 나이를 거꾸로 먹는 비결 아닌 비결이라는 것이다. 20대 때와 체력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 신지애는 근력과 체력을 키우는 훈련에 더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어느 순간 골프란 스포츠를 삶과 연결해 긴 호흡으로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시각을 갖게 됐고 늘 스스로에게 자극을 주면서 ‘롱런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아쉽지만 ‘36세 신지애’가 대단한 성적을 낸 이날 공교롭게도 ‘36세 김인경’이 단독 81위(11오버파 299타)로 경기를 마친 뒤 은퇴의 길을 택했다.
1988년생 김인경도 신지애, 박인비, 김하늘, 이보미 등과 함께 대한민국 골프를 이끈 ‘황금 세대’ 멤버다.
1988년생 중 김인경만큼 부침이 컸던 선수도 없을 것이다.
2007년 ‘루키 해’를 보낸 김인경은 다음해 롱스 드러그스 챌린지에서 생애 첫 승을 거두면서 화려한 날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2009년 LPGA 스테이트 팜 클래식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상금랭킹 8위에 올랐고 로레나 오초아 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한 2010년에도 상금랭킹 7위를 기록했다. 김인경의 전성기였다.
이즈음 김인경의 골프 인생에 평생 잊지 못할 아쉬운 장면이 나온다. 2012년 시즌 첫 메이저대회인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최종일 18번 홀에서 30㎝ 퍼팅을 놓치면서 메이저 우승을 날려 버린 것이다. 그 사건 이후 김인경은 트라우마가 생긴 탓인지 한동안 우승 가뭄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2011년 상금랭킹 11위에 올랐고 2012년에도 상금랭킹 26위로 무난한 해를 보냈다.
2013년에는 준우승 두 번을 포함해 ‘톱5’에 다섯 차례나 들면서 상금랭킹 7위에 올랐다. 하지만 2014년 상금 48위, 2015년 상금 54위로 잠시 슬럼프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토록 기다리던 통산 4승 소식이 날아들었다. 2016년 9월 레인우드 LPGA 클래식에서 6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이다.
이 우승으로 김인경은 2017년 ‘30㎝ 퍼팅 실수의 트라우마’를 벗어 버리고 제2 전성기를 맞이했다.
숍라이트 LPGA 클래식과 마라톤 클래식 그리고 메이저대회인 리코 위민스 브리티시오픈까지 3승을 거둔 것이다. 그렇게 메이저 우승을 차지한 2017년은 마지막 불꽃을 태운 골프 인생의 정점이었다.
이후 2018년 상금 50위, 2019년 상금 53위로 버텼던 김인경은 컷 통과조차 힘겨운 시간을 보내면서 2020년 상금 147위, 2021년 상금 122위, 2022년 상금 105위, 2023년 상금 158위 등 상금랭킹 100위 밖 선수로 밀려 났다.
하지만 올해 김인경은 은퇴를 앞두고 의미 있는 기록 하나를 세웠다. 88년생 동갑내기 친구는 물론 후배들까지 은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선수 생활을 포기하지 않은 김인경이 2007년 입문한 뒤 18년 만에 1000만 달러 돌파의 꿈을 이룬 것이다. LPGA 투어 사상 26번째이고, 한국선수로는 8번째였다.
김인경은 은퇴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재능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항상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며
“좋을 때도 있었고,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골프를 통해 제 삶이 바뀌었고 좋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지금도 연습장에 가서 오늘 안 된 부분을 연습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는 김인경의 말은 그가 얼마나 노력하는 선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18년 그의 길은 지난하고 험난했지만 마땅히 박수 받아야 할 대단한 모험이었다.
오태식 기자 ots@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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