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 상자’ 다시 열리나…강대국의 핵무기 경쟁 [최준영의 경제 바로읽기]
美, 핵실험 재개 카드 만지작?…무한경쟁 국면으로 치달을 가능성
(시사저널=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냉전 종식 이후 가장 큰 변화는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물론 대한민국은 북한 핵무기의 큰 위협 앞에 놓여 있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전면 핵전쟁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낮아졌다. 전 세계 핵탄두 숫자는 1986년 7만 개에서 2023년 1만2000개로 대폭 감소했다. 핵무기는 만약의 사태를 위한 대비책일 뿐 실전에 사용되거나, 핵무기를 다시 확충하는 일은 최소한 강대국들 사이에서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암묵적 합의사항이었다.
하지만 핵무기를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기존 핵무기 감축 조약의 유효기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미국과 러시아는 핵무기 추가 감축에 합의하는 신전략무기 감축협정(New START)을 체결했다. 2021년까지 유효했던 이 협정은 그해 양국이 5년 연장에 합의했다. 하지만 지난해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협정 참여를 중단하면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2002년 핵무기 관련 조약인 탄도탄 요격유도탄 조약(ABM)에 이어 2020년 중거리 핵전략조약(INF)도 파기된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핵군축 협정이 파기된다면 핵무기를 억제할 외교적 수단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러는 파기 위협, 中은 핵 증강…美 선택은?
최근 중국은 자국의 핵무기 보유를 대폭적으로 늘리고 있다. 미 국방부 보고서에 따르면, 350개 내외로 평가되던 중국의 핵탄두는 2027년 700개, 2030년엔 1000개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소한의 핵전력 보유를 원칙으로 하던 중국의 변화에 대해 미 국방부는 1957년 스푸트니크 충격과 유사한 상황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1000개 핵탄두를 보유하더라도 배치·보관 중인 탄두를 기준으로 미국은 3800개, 러시아는 4495개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전력에서는 미국과 러시아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다.
중국은 소련의 붕괴를 지켜보면서 과도한 군비경쟁에 끌려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래서 재래식 전력을 충분히 현대화한 뒤 핵전력을 강화한다는 것이 1990년대 중국의 안보전략이었다. 이후 중국은 충분한 재래식 전력을 확보했다는 판단하에 핵전력 증강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2019년 국방전략을 발표하면서 핵무기는 국가 안보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으로만 유지하며, 선제공격 및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발표하면서 자국의 핵무기는 방어용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중국의 원칙은 2021년 3월 시진핑 주석의 명령으로 크게 변화했다. 소수의 핵무기가 미국 또는 러시아의 대규모 정밀타격에 의해 일시에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면서 선진화된 전략적 억제력 체계 구축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 같은 발언은 미국의 경제·외교적 압력이 커지는 상황 속에서 이에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따라 미국과 동등한 수준의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경제력을 확보했다는 자신감을 내부적으로 과시하는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위성영상 분석 결과, 중국은 시 주석의 지시 이후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300개 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사일로 신규 건설에 착수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당초 중국이 보유한 ICBM 사일로가 20개 내외였던 것을 고려하면 대규모 증강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상대의 선제공격에 보복하기 위한 상호확증파괴(MAD)에 최적화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에서 아직 미국에 맞서기 곤란하기 때문에 ICBM 확대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중국이 400개 이상의 ICBM 사일로를 보유할 경우 미국이 중국에 대해 선제 핵공격을 가하더라도 이를 모두 파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에 더해 미국의 사일로는 평방인치당 2000파운드의 압력에 견딜 수 있는 수준인 데 비해 새로 건설되는 중국의 사일로는 3000파운드 이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0년대 건설된 미국의 사일로와 2020년대 기술로 새로 만들어지는 중국 사일로 사이에 기술적 격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말로만 핵실험 금지…언제든 재개 가능
러시아의 핵협정 파기와 중국의 핵전력 증강에 따라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 핵실험 재개를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의 핵 능력을 과시할 뿐만 아니라 기존 핵군축 체계에서 빠져 있던 중국을 군축 테이블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로 인해 핵실험을 둘러싼 취약한 제도적 상황이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일반적으로 미국을 포함한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어떠한 형태의 핵실험도 금지하는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IBT)에 가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 미국, 러시아 그리고 중국은 이를 비준하지는 않고 있다. 미국의 경우 1996년 의회에서 비준을 거부했으며, 중국은 이를 이유로 비준을 거부했다. 러시아의 경우 2000년 비준했지만 2023년 11월 이를 철회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세계 3대 핵 보유국은 모두 법적인 책임 없이 핵실험을 언제라도 재개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미국이 CIBT를 밀어붙였던 것은 당시 미국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핵실험 없이도 기존 핵무기에 대한 관리와 성능개량 등을 실행할 수 있었지만 다른 국가들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을 이용해 핵 능력의 격차를 확대시키겠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중국은 미국보다 더 빠른 슈퍼컴퓨터를 대규모로 보유하고 있기에 미국이 생각했던 구도는 붕괴되고 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핵실험을 재개한다면 의도한 대로 핵전력 과시를 통한 억제력으로 작용할지, 아니면 중국·러시아에 핵실험 재개를 통한 기술 도약 기회를 제공해 줄지를 둘러싼 논란이 미국 내에서 거세지고 있다.
핵무기는 단 한 번의 사용으로 인류의 생존과 문명 전체를 사라지게 하는 특성으로 인해 다른 무기와 달리 법적·윤리적 책임이 뒤따르는 존재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생생한 20세기에는 이러한 책임이 유효한 억제수단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과거의 기억은 사라진 상황에서 핵무기는 다시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존재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와 같이 이를 협력과 양보를 통해 관리할 수 있을지, 아니면 무한경쟁 국면으로 전환될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강대국 지도자들의 판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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