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것 그대로 드러난 나무의 단면… 방치된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다[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5) 날것들의 돌출과 생동, 응축된 생명의 에너지
폐기된 인공물 등 조합해
생명성 지닌 구조체 생산
환경의 일부가 된 작품들
자연의 순환 구조 드러내
구도자처럼 과정에 주력
작가보다 자연을 내세워
이재효는 용도 폐기된 인공물 혹은 방치된 자연물들을 깎고 다듬어 이를 견고한 형태로 조합하여 강한 생명성을 지닌 구조체를 생산해 낸다. 이러한 구조체는 조각 또는 설치의 형태로 관객에게 제시되거나 그 스스로 환경의 일부로 작용하면서 자연의 순환구조를 암암리에 드러낸다. 공간구조나 장소성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재효의 작업은 노동집약적인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그는 ‘작품과 나는 별개’라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모순적 발언에 이재효 예술의 핵심이 있다.
“내 작품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산물이다. 내 작품 속에 나의 이야기를 담기를 원하지 않는다. 단지 나무 자체의 아름다움만 볼 수 있으면 된다. 작품이 홀로 존재할 수 있을 때 그 작품은 모든 이와 공감대를 가질 것이다.” (이재효 작가노트 중에서)
바르트(R. Barthes)는 ‘저자의 죽음’에서 저자를 텍스트와 의미의 근원이자 해석의 주체로 보는 것을 거부하였다. 바르트가 선언한 저자의 죽음은 곧 창조자로서 예술가라는 개념의 종말을 시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창조적 천재나 텍스트 의미의 원천으로 숭배되었던 지위를 더 이상 보유하지 못하고, 텍스트와 독해 사이의 하나의 소모품이 된다. 이재효의 예술 역시 마찬가지다. 이재효는 작품에 진리를 주입하려 하지 않는다. 진리에 관한 각자의 정답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별적 세상에서 각자의 인식체계 안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가 생각한 우주나 인식, 체험한 경험을 정답으로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결국 나만의 인식, 나만의 경험, 나만의 정답을 각자 자기만의 습성과 표현으로 가꿔가야 할 운명을 지닌 자(者)가 작가이다.
이재효는 마치 구도자처럼 자신만의 관점과 방식으로 부단히 작업한다. 그러나 그 작업이라는 것은 열린 개념으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접근법으로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다. 자연이라는 가치를 표상하여 소통을 추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인식 간의 관계를 하나의 대상에 육화시켜 이에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는 노력은 예술보다는 구도의 영역에 비견된다. 그는 구도자와 같이 자연의 본질을 찾아 유랑하며 그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들을 수습하여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에 주력할 뿐이다.
자연적 삶의 모습과 생명을 추구하는 조형 실험이 뒤섞인 이재효의 예술적 접근 방식은 보는 사람에게 다양한 성찰을 유도하고 있다. 이재효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재료의 특성을 파악하여 거기에 맞는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요약한다. 그러고 보면 작가는 수명을 다한 자연물이나 용도 폐기된 인공물을 찾아 이의 조형적 가능성을 파악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연금술사에 가깝다. 이재효의 작업은 사물이 보여주는 외연적인 가치에 반응한 것이나 이를 특정한 의미에 의해 암시되는 서술의 맥락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는 전통적인 조각에서 보여주었던 논리구조를 가진 이상적인 형상을 재현하는 것보다는 재료의 물질적인 현존성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효과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이 재현적 오브제라기보다는 물질과 비물질의 한 지점에 존재하는 인식론적 실체임을 웅변하고 있다.
작가는 ‘원본과 재현’이라는 조각의 오랜 과업에서 자유로운 태도를 보이면서 주제의 서술이라는 부담에서 벗어나 자신을 끝없이 단련하는 ‘생명성’이라는 방향을 견지하고 있다. 이때 발견된 오브제들의 기념비적인 전개 방식과 그 원형(原形)의 속성들로 관심이 분산됨으로써 한 치의 헛된 구석도 용납지 않으려는 듯한 작가의 예술적 욕망은 교묘히 은폐된다. 이는 작가가 누누이 바라는 바이다. 엄격하고 짜임새 있어 보이는 이재효의 작업은 주체적 자기합리화의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 관념을 위탁하고 공간에 육신을 내맡긴 영겁회귀의 장(場)이 된다. 기실 작가의 미적 욕망은 완벽한 조형성에 몰입되어 있을 테지만 그의 내적 욕망은 자연이라는 고유성 혹은 본연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재효는 나무의 단면을 날것 그대로 노출함으로써 선명히 드러난 나이테가 이미 수명을 다한 나무의 이력을 전해주는가 하면, 나뭇가지나 잎을 수습하여 또 다른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생명 순환의 자연 구조를 보여주는 데 진력한다. 시간을 소요하는 지난한 노동과 미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강력한 조형 의식이 작업 전반에 관류하고 있음에도 작가는 뒤로 물러서고 자연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우리를 아득한 미적 경험에 몰입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잘 다듬어진 목재 단면의 광택과 옵티컬한 요소, 검게 탄 지지대의 포지티브한 면과 대비를 이루며 금속의 네거티브한 속성을 암암리에 노출하는 못 작업, 그리고 작업 전반에 언뜻언뜻 노출되는 기하학적 이미지들에서 강한 조형성을 발견한다. 공간을 고려한 설치로 중력을 완화하면서 질서 있게 매달려 우주의 기운을 전달하는 자연의 편린들이나, 서로 힘을 떠받치면서 확고한 구조로 공간의 이곳저곳에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는 설치물들 역시 예술적 속성을 현시하는 것이다. 이재효는 대상의 외피보다는 그 본질의 탐색을 통하여 사물의 정수를 보고자 한다. 그것이 자연이든 우주든 아니면 나무토막 자체이든 간에 작가는 그것을 재현의 형식으로 드러내지 않고 형상 자체를 제시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작가는 재현된 작품보다는 행위의 흔적을 노출함으로써 지속가능성을 보여주거나 재료의 속살을 날것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매재(媒材)가 지닌 생명성에 호응하고자 하는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기호화된 자연물들은 강한 형상성을 풍기며 작가의 장인적 노고를 부각한다. 조합된 잎이나 줄기들은 서로 어울려 군집을 이루다가도 형태나 색채, 밝음과 어두움을 달리하며 조화와 변별을 조장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형상을 통하여 자연물이라는 외형을 구분하려 하기보다는 형태의 변주와 물질의 실험,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진화 도식을 만들어 내면서 새로운 조형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이경모 미술평론가
이재효 작가는
홍익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청년작가초대전’ 대상(1997), 문화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1998), ‘오사카트리엔날레’ 조각대상(1998), ‘김세중 청년조각상’(2000), 우드랜드 조각상(2002), ‘베이징올림픽환경조각전’ 우수상(2008) 등을 수상했다.
1996년 예술의전당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일민미술관, 신시아 리브스 현대미술관(Cynthia-Reeves Contemporary·뉴욕), 앨버말 갤러리(Albemarle Gallery·런던), 갤러리 에트라(Galeria Ethra·멕시코), 갤러리 노르덴더(Galerie Noordeinde·네덜란드), 성곡미술관 등에서 5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일민미술관, 일본 오사카현대문화예술센터, 일본 효고현립미술관, 서울 워커힐호텔, 미국 코넬대 허버트존스미술관, 대만 그랜드하얏트 호텔, 미국 워싱턴DC 파크 하얏트호텔, 대만 산업은행, 나이키 연구센터, 롯데 시그니엘, 애플코리아 등 국내외 주요 기관 및 단체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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