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달려봐도 태양은 계속 내 위에… 난 무엇을 집착하나 [주철환의 음악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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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노래가 사이좋던 시절엔 글로 읽으면 시(詩), 노래로 부르면 곡(曲)이었다.
햇살 가득한 슬픔이라는 가사 때문이겠지만 그의 대표작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가 니노 로타(1911∼1979)의 음악과 함께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태양이 사라져도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고 이미자는 노래(제목 '태양은 늙지 않는다')했지만 그건 음악동네의 미신일 뿐이다.
노래를 부른 가수(비)조차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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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노래가 사이좋던 시절엔 글로 읽으면 시(詩), 노래로 부르면 곡(曲)이었다. 황진이가 벽계수를 유혹할 때 그 마음을 시로 낭독했겠는가. 어떤 곡조인지 가늠할 순 없으나 애절히 노래로 불렀으리라. 대부분의 시조 작가들은 싱어송라이터였다. 옛 시들을 모은 문집 이름이 해동‘가요’ 악장‘가사’ 시용향‘악보’인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학창 시절엔 교과서에 실린 고려가요나 조선 시대 가사들을 대중가요에 얹어 부르는 게 유행이었다. 입시에 대비한 일종의 고육지책(교육지책은 아님)이었다. 특히 남진의 ‘님과 함께’ 멜로디에 고전시가의 원문을 대입하면 신기하게 딱딱 맞아떨어졌다. 길디긴 ‘사미인곡’ ‘관동별곡’을 통째로 암기한 친구도 있었다. 목격자처럼 진술했는데 사실은 내 얘기다.
‘사미인곡’은 정철(1536∼1593)의 작품인데 거기 ‘염량이 때를 알아’라는 구절이 나온다. 염량(炎凉)은 더위와 서늘함이 합쳐진 말이다. 때가 되면 여름이 가을에 자리를 양보하는 게 순리인데 지금의 자연은 도무지 자연스럽지 않다. ‘복더위보다 짜증스럽던 노염이 맥없이 수그러들면서 수풀을 흔들고 와 닿는 바람이 샘물처럼 청량해졌다.’(박완서의 소설 ‘미망’) 노염(老炎)은 열차를 놓치고 어느 순간 폭도(폭염)로 변해 8월 말의 거리를 사막으로 바꾸고 있다.
오늘은 고전마을에 좀 오래 머물렀다. 음악동네 직행버스를 타고 스마트폰에 지문을 얹는 순간 알랭 들롱(1935∼2024)의 부고(訃告)가 액정에 뜬다. 세기의 미남이 출연한 영화를 열 편 이상 본 팬으로서 애도의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잊을 수 없는 기억에 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 안고 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이문세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햇살 가득한 슬픔이라는 가사 때문이겠지만 그의 대표작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가 니노 로타(1911∼1979)의 음악과 함께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알랭 들롱은 이문세의 노랫말처럼 ‘저 별이 지는 가로수 하늘 밑 그 향기 더하는’ 존재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음악동네에서 태양은 보물이기도 하고 애물이기도 하다.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추겠다는 사람(한대수 ‘행복의 나라로’)이 있는가 하면 ‘타오르는 태양 아래 질척이며 녹아가네 회색빛의 빌딩 숲 끝이 없는 기말고사’(투모로우바이투게더 ‘Our Summer’)로 태양을 피하려는 청년들도 있다.
‘태양이 사라져도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고 이미자는 노래(제목 ‘태양은 늙지 않는다’)했지만 그건 음악동네의 미신일 뿐이다. 그 반대로 사랑이 사라져도 태양은 영원하다. 제2회 대학가요제(1978)에서 박광주 최혜경이 부른 ‘젊은 태양’은 같은 해에 출연했던 심수봉이 다시 불러서 크게 히트했다. 노래 끝부분에 근본적인 질문이 나온다. ‘우리는 너 나 없는 나그네 왜 서로를 사랑하질 않나.’
노래를 부른 가수(비)조차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아무리 달려봐도 태양은 계속 내 위에’ 있기 때문이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찾기 전에 태양을 피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대답하라. 지금 나는 무엇에 집착하여 미망에 사로잡혔는가. 서태지가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려야 한다.’(‘난 알아요’) 각성했듯이 눈물 어린 고백과 다짐으로 ‘너’를 보내고 ‘나’를 마주하자. ‘내 눈물 강을 이뤄 흐를 정도로 많이 울어서라도 너를 잊고 제대로 살고 싶어.’(비 ‘태양을 피하는 방법’)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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