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살기 막아내는 ‘봉황의 터’ 강원도 건봉사

안영배 미국 캐롤라인대 철학과 교수(풍수학 박사) 2024. 8. 26.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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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배의 웰빙 풍수] 봉황은 전쟁 막아주는 전설의 영물, 태평성대와 성인의 출현 상징
건봉사 경내. [안영배 제공]
북한, 중국, 러시아 등 아시아 대륙에 있는 나라들의 움직임이 여간 수상쩍은 게 아니다. 서북풍을 이용한 오물풍선과 미사일 등으로 남한을 도발하는 북한, 최근 북한과 군사협정까지 맺은 러시아, 끊임없이 한국을 종속국인 양 겁박하는 중국 등 한반도가 금방이라도 분쟁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갈 듯하다. 코로나19 사태라는 병란(病亂) 이후 불거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 문제 등 세계 곳곳의 전란(戰亂) 분위기도 한반도를 옥죌 듯한 기세다.

필자는 아시아 대륙에서 뻗어오는 폭력적인 광기 혹은 살기가 지나치다고 느껴질 때면 찾아가는 곳이 있다. 강원 고성군 거진읍에 있는 건봉사(乾鳳寺)다. 휴전선 바로 아래 한국 최북단 사찰이자,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금강산 본줄기에 위치한 곳이다.

건봉사에 숨겨진 풍수 비화

건봉사는 풍수적 입지로 살펴봐도 매우 특별한 곳이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몰아치는 대륙의 살기와 그에 편승한 북한쪽 음기(陰氣)가 원산을 거쳐 남한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즉 건봉사는 서북방의 대륙 살기를 막아내는 최전선 방어막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건봉사의 독특한 입지는 오래전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건봉사는 1500여 년 전 신라 법흥왕 때(520) 아도화상이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고, 이후 신라 말 한국 풍수의 개조(開祖)로 추앙받는 도선국사가 서봉사(西鳳寺)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그러다 고려 말인 1358년 나옹선사가 중건하면서 건봉사로 개칭했다. 나옹선사는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운 풍수 대가 무학대사의 스승이었을 정도로 풍수에도 밝았다. 절을 개창한 사람이나 중건한 사람 모두 터의 기운을 읽고 조절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갖춘 도승(道僧)이었던 것이다.

이 터의 성격은 건봉사라는 이름에 그대로 나타난다. 건봉사 서쪽에 봉황 모양의 바위가 있어 서봉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전해지지만 주변에서 그렇게 생긴 바위는 발견된 바 없다. 반면 한반도 북서쪽(주역 8괘로는 건(乾) 방위)의 살기를 막는 봉황 터라 '건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는 해석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봉황은 전쟁이나 살기를 막아주는 전설의 영물(靈物)로 태평성대와 성인의 출현을 상징한다.

실제로 건봉사는 북서방에서 오는 살기를 감당해내느라 여러 번 몸살을 치른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청나라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으로 몸살을 앓던 19세기 중반 조선으로까지 뻗쳐오던 중국발 살기를 터의 기운으로 막아내다가 결국 1878년 사찰 건물 3000여 칸이 전소됐다. 살기를 막다가 화마(火魔)로 희생을 치른 것이다. 1950년대 중국과 러시아가 개입한 6·25전쟁 때도 그랬다. 전쟁의 살기를 버텨내다가 결국 사찰이 완전히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현 건봉사 전각은 그 후에 중건한 것이다.

필자는 이런 역사와 풍수적 배경을 지닌 건봉사에서 마음속으로나마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곤 한다. 건봉사는 필자에게는 국토를 사랑하고 지키는 행위인 '수토(搜討)' 여행의 중요한 순례 코스이기 때문이다.

북서방 살기 막고자 문 설치해

창의문(왼쪽) 천장에 새겨진 봉황 그림. [안영배 제공 ]
북서방은 '방위풍수'에서도 특별히 주목하는 방위다. 예부터 천문(天門), 즉 하늘 기운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해서 옛사람들은 예사로이 여기지 않았다. 이 방향으로 대문을 내거나 집을 짓는 것도 매우 조심스러워 했다. 특히 외침에 자주 시달렸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서방을 '오랑캐 방위'라고 해 매우 경계하기도 했다. 게다가 북서쪽은 한반도 지형상 겨울철 삭풍(朔風)이 불어오는 방위다. 북서방이 높다란 산 등으로 막히지 못하고 트여 있을 경우 북서향 집은 겨울에는 찬바람이 곧장 들이쳐 매우 추울 뿐 아니라, 여름에는 저녁까지 이어지는 석양빛이 집 안 깊숙히 들어와 더위를 더 타게 된다.

북서방은 조선왕실에서도 특별히 유의했다. 한양도성의 출입문 중 하나인 창의문이 그 증거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잇는 낮은 고갯마루에 설치된 창의문은 한양도성 사소문(四小門) 중 유일하게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문이다. 이곳 자하동 계곡의 이름을 따 '자하문'으로도 불리는 이 문은 북서방을 지키는 관문이었다.

지도에서 이곳 위치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창의문은 경복궁을 기준으로 북서쪽에서 한양도성으로 진입하는 관문에 해당한다. 즉 창의문은 청와대를 포함한 경복궁 일대로 불어오는 북서방의 찬바람뿐 아니라 살기를 막아내는 방어문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조선 풍수학자들도 창의문을 두고 왕에게 이런저런 간언을 했다. 태종 13년(1413)에 지관 최양선은 경복궁의 오른팔에 해당하는 서쪽 고갯길 문(창의문)으로는 길을 내지 말아야 지맥(地脈)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고 간언했다. 북서방쪽 살기를 차단하려면 창의문을 폐쇄하고 사람의 출입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문종 때는 또 다른 지관 문맹검이 "창의문은 하늘의 천주성(天柱星: 하늘의 기둥이라는 뜻을 가진 별자리)에 해당하는 자리"라면서 "평소에 닫고 보전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북서방이 '천기가 출입하는 천문'이라는 뜻과도 어느 정도 연결되는 주장이다.

실제로 창의문 앞에 서면 '하늘의 기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공중에서 내려오는 천기(天氣)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다. 북서방의 살기를 감당해낼 수 있는 터에 문을 설치한 옛 사람의 지혜가 놀랍다.

흉한 기운 차단하는 봉황

창의문은 북악산과 인왕산을 잇는 고갯마루에 자리했다.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제공 ]
창의문 천장에 새겨진 두 마리의 봉황 그림 역시 건봉사의 봉황처럼 살기를 막아내는 상징 코드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한양도성의 8대문(4대문과 4소문) 중 봉황이 그려진 문은 창의문 외에 한 곳이 더 있다. 바로 한양도성 동북방을 지키는 혜화문(홍화문)이다. 예부터 북동방은 귀신이 출입하는 방위라고 해서 '귀문방'으로도 불렸는데, 북서방과 함께 경계 대상이던 방위다. 따라서 창의문과 혜화문의 봉황 그림을 통해 이 두 곳이 조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방위임을 알 수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냉난방 시설 등 과학기술 덕분에 방위에 대한 두려움 혹은 믿음이 많이 희석된 편이다. 이에 따라 북서 방향 또는 북동 방향으로 건물을 짓거나 출입문을 낸 경우를 적잖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방향에서 불어오는 물리적 바람은 극복한다고 쳐도 살기(殺氣)까지는 차단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북서 방향으로 계곡이 바로 보이는 곳이나, 북서 방향에서 도로가 곧장 건물이나 집을 향해 쳐들어오는 듯한 지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때 주로 건물주 혹은 집주인에게 관재구설, 질병, 사고 같은 우환이 따른다고 본다. 이는 북서방이 주역 팔괘(八卦) 중 기업 오너, 집안 가장, 권력, 무력 등을 상징하는 건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처하는 풍수적 비보(裨補) 장치도 있다. 바로 조선 사람들이 사용했던 봉황이다. 봉황을 묘사한 조각상, 그림 등을 북서 방향에 배치함으로써 살기를 차단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북서방쪽으로 나무 숲 등을 조성해 흉한 기운을 차단할 수도 있다. 이는 전통 마을에서 풍수적 약점을 보완하고자 조성한 비보림(裨補林) 풍수에 해당한다.

풍수에서는 바람과 물을 실제적으로 막거나 차단하는 물리적 장치뿐 아니라, 기운이 담긴 상징 문양이나 그림 등을 이용한 심리적 방어 장치 또한 비보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아무튼 한국이 북서방의 살기를 막아내고 평화로운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마음으로나마 봉황을 초대해본다.

안영배 미국 캐롤라인대 철학과 교수(풍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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