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힘 호소하던 60대 스스로 목숨 끊어 가해자 지목된 직원도 경찰조사 중 사망 유족 "관리사무소가 사태 방치한 책임"
'드릴 들고 찌르려고 했음. 그 후 트라우마로 정신과 치료 받고 있음.'
대전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던 수리기사 강모(65)씨가 11일 유서에 남긴 내용이다. 24시간 교대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강씨는 수첩 종이를 뜯어 피해 사실을 한 자 한 자 새겼다. 눌러쓴 유서를 품에 넣은 그는 다시 근무지로 돌아왔고, 일하던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목을 졸랐다' '직장 내 괴롭힘당하는 사람이 없길 바라며 엄중 처벌해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문장을 포함해 유서에는 수년간 고통이 담겨 있었다.
25일 경찰 등에 따르면, 대전 둔산경찰서는 11일 강씨가 일하던 아파트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는 신고를 접수했다. 유서에는 그가 직장 동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강씨 사망으로부터 9일이 지난 20일, 같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근무하는 다른 직원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강씨가 지목한 가해자 A씨였다. A씨는 이날 경찰 조사를 앞두고 자택 인근에서 투신했다.
위협·목 졸림·타박상... 정신과 진료
강씨가 이 아파트에서 일을 시작한 건 2021년 9월이다. 가족들은 강씨가 새 직장을 얻고 기뻐하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은퇴 후 가장으로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하던 강씨는 재취업 상담을 적극적으로 받으며 일자리를 찾았고, 부단한 노력 끝에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가족들 역시 "일흔 살까지 일할 것"이라고 웃으며 되뇌는 아버지를 한마음으로 반겼다.
이상이 감지되기 시작한 건 지난해 1월이다. 강씨가 느닷없이 정신의학과를 다니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강씨는 병원에 간 이유로 "잠이 잘 오지 않고 잡념이 많다"고 말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강씨가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한 때는 강씨가 유서에서 '드릴로 위협당했다'고 서술한 시점과 일치한다는 게 유족의 주장이다. 강씨는 유서에서 세 차례 피해를 언급했는데, A씨와 다툰 뒤 목을 졸리는 등 폭행을 당하고 7일에는 이리저리 끌려다녀 허벅지에 타박상을 입었다는 내용도 있다.
경찰 조사 결과 강씨는 사망 약 일주일 전 상사에게 갈등 사실을 알렸다. 그날 관리사무소에선 갈등을 중재하기 위한 회의가 진행됐지만 그 회의가 상황을 해결하진 못했다. A씨와 언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상사는 "이런 일이 절대 있으면 안 된다"며 둘을 중재했고 "앞으론 잘할 수 있다"는 강씨의 말을 끝으로 회의가 끝났다.
강씨는 사망 당일인 11일 오전 10시쯤에도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25분간 통화를 이어갔다. 통화를 마친 후 자신이 당한 폭행 사진 5장을 문자로 보내기도 했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과 점심식사까지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근무하던 기계실에서 숨졌다. A씨는 사망 전 강씨의 장례식장에 방문해 조의를 표하고 경찰과 조사 일정 조율에도 적극 응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 "관리사무소가 괴롭힘 방치"
유족은 조사도 이뤄지기 전 두 사람이 숨진 책임이 관리사무소에 있다고 비판했다. 근무조 변경 등 대안 마련을 계속 요구했음에도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들 강모(35)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른 직원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근무조를 변경하고 싶단 얘기를 수차례 반복했던 것으로 안다"며 "회사에서 진작 분리조치를 했으면 두 사람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30여 명밖에 되지 않는 관리사무소 일원으로 근무했다"며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에서 자치 운영하는 곳인데 수년간 이를 방치했다는 건 관리 소홀로 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관리사무소는 폭행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그런 일이 있을 줄 몰랐다"며 "최근 강씨가 중재를 요청한 회의 때도 몸싸움 얘기는 없고 언쟁이 있다는 수준으로만 이야기가 오갔다"고 말했다. 강씨 사망 당일 진행한 25분간 통화 내용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가해자로 지목된 A씨가 사망해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