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는 직원이 부리고 돈은 회사가 번다?
소송 걸어도 수년간 시달리다 포기하기 일쑤…전문가들 “직무발명 보상제도 손봐야”
(시사저널=이석 기자)
직무발명 보상제도가 재계의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직무발명이란 직원이 업무 수행 중에 개발한 새로운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말한다. 기업 경쟁력을 높이면서 직원들의 근로 의욕까지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제도를 채택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특허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의 79.3%, 중견기업의 63.9%가 이 직무발명 보상규정을 보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신세계 계열인 G마켓은 매년 사내 혁신 아이디어 경진대회인 '해커톤(Hackathon)'을 개최하고 있다. 행사에서 나온 우수한 아이디어는 특허를 출원할 수 있도록 회사가 지원하고 있다. 미국에 특허 출원한 온라인 사기거래 탐지 기술이나 중고물품 가격 예측 시스템 등도 이 해커톤을 통해 탄생했다.
대기업 79.3%가 직무발명 보상규정 보유
SK하이닉스의 경우 회사 성장과 기술혁신에 기여한 특허를 발명한 직원에게 포상하는 '혁신특허포상'을 2018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도 현재 기술혁신에 기여한 특허 발명 직원에게 포상하고 있다. 특히 현대·기아차의 경우 국내외 특허 출원과 특허 활용에 따른 기술 기여도 등을 평가해 제안자에게 최대 10억원까지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도 적지 않다. 특허나 아이디어의 성과 및 기여도를 두고 직원과 회사 간 분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KT&G가 대표적이다. KT&G 연구원이었던 곽대근씨는 지난 4월 회사를 상대로 2조8000억원 규모의 직무발명 보상금 청구 소송을 법원에 제기했다. 자신이 연구원 재직 시절에 발명한 전자담배 기술의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게 소송의 이유다. 그에 따르면, 미국 담배회사 필립모리스인터내셔널(PMI)은 2017년 5월 전자담배인 '아이코스'를 국내에 출시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국내시장을 잠식당한 KT&G는 대응에 나섰고, 그해 11월 부랴부랴 '릴'을 출시했다. 하지만 한동안 아이코스의 독주를 지켜봐야 했다.
문제는 KT&G가 이전부터 전자담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곽씨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2007년 내부가열식 궐련형 전자담배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고, 국내 특허 등록까지 마쳤다"면서 "하지만 이후 10년 동안 해외 특허 출원·등록을 하지 않았고, 추가 연구개발도 하지 않으면서 해외 담배 기업에 시장을 잠식당했다"고 주장했다. KT&G가 일찌감치 전자담배 상용화에 나섰다면 글로벌 시장 판도가 지금과 달랐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KT와 삼성전자, LG전자, 네이버 등도 현재 보상 문제로 직원과 법적 분쟁을 벌이고 있다. 재직 시절 발명한 특허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해달라는 게 대부분이다. KT의 경우 특허청 산업재산권 분쟁조정위원회에 분쟁조정이 신청됐지만, KT 측의 참여 거부로 조정이 결렬되기도 했다. KT 전직 직원인 이아무개씨 등에 따르면, 과거에는 KT IPTV(인터넷TV) 리모컨의 전원 제어 버튼은 TV용과 셋톱박스용으로 나눠져 있었다. 이씨 등은 2개였던 이 버튼을 하나로 통합하는 기술을 발명했고, 2012년 2월 국내 특허 등록까지 마쳤다. 퇴직 후 이 발명 특허에 대한 법적 보상을 KT 측에 신청했지만 석연찮은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결국 이씨 등은 KT 기술부서와 리모컨 제조업체의 확인서 등을 증거자료로 첨부해 산업재산권 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했다. 조정 신청 초기만 해도 KT 특허 담당 부서는 2주의 검토 기간을 위원회 측에 요청했다. 하지만 2주가 지나자 조정 참여 거부 의사를 위원회에 통보했다. 위원회가 법적 강제성이 없는 조정 기관이기 때문이었다.
분쟁 시 비용 평균 5800만원에 40개월 소요
이씨 등은 "KT가 직무발명 보상제도의 좋은 취지를 교묘하게 악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씨는 "리모컨에 특허가 적용되고 있고, 특허권 유지를 위해 특허 등록료를 계속 납부하고 있다는 증거를 모두 제출했다"면서 "하지만 회사는 뚜렷한 이유 없이 보상 협상에 응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은 소송에 나서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씨는 "직무발명 보상 소송에 수천만원의 비용과 수년의 소송 기간이 소요된다"면서 "때문에 상당수가 현실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소송을 포기한다. KT 특허 관련 부서 역시 이 같은 점을 노리고 배짱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국가지식위원회의 특허 소송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재산권 침해 분쟁 발생 시 평균 5800만원의 비용과 40개월의 기간이 소요된다. 직무 발명자는 거대 로펌을 등에 업은 대기업을 상대로 법정에서 부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관계자는 "재판부가 자료 제출을 요구해도 회사가 '영업비밀'을 이유로 내놓지 않으면 사실상 강제할 방법이 없다"면서 "일반인의 경우 소송으로 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발명진흥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이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 상태다. 이후석 유니콘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변리사는 "기존 발명진흥법에는 직무발명 보상금 산정을 위한 자료 제출 명령제도나 비밀 유지 명령제도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직무발명 대상인 기술 역시 영업비밀로 취급돼 제출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개정된 발명진흥법에는 영업비밀이 자료 제출 거부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만으로 직무발명 보상금 산정과 관련된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LG 전 직원, 회사와의 소송에서 승소
재계 안팎에서는 최근 삼성전자와 LG전자 퇴직자들이 직무발명 보상금 청구 소송에서 잇달아 승소한 점에 주목한다. 대법원 2부는 지난 5월 삼성전자 퇴직자인 A씨가 삼성전자를 상대로 제기한 직무발명 보상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특허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1997년 8월 세탁기 필터 관련 기술을 발명해 회사에 특허권을 넘겼다. A씨는 퇴사한 지 17년 후인 2015년 삼성전자에 직무발명 보상금 신청을 했다. 하지만 회사가 이를 거부하자 소송으로 이어졌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이 이를 뒤집었다. 원고 패소 판결을 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특허법원으로 돌려보냈다.
LG전자 역시 최근 특허 기술을 개발한 직원들에게 직무발명 보상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으면서 잇달아 재판에서 패소했다. 전직 LG전자 직원 B씨가 지난 5월 LG전자를 상대로 제기한 직무발명 보상금 소송이 대표적이다. B씨는 1997~2008년 LG전자기술원 OLED팀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전계발광소자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고,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미국, 일본, 중국 등에서 특허를 획득했다. B씨로부터 이 기술을 승계받은 LG전자는 2015년 지식재산권(IP)을 관리하는 회사와 특허권을 양도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B씨에게 보상금을 주지 않아 소송이 발생한 것이다.
LG전자 측은 소송에서 "이 계약을 통해 얻은 이익이 사실상 없다. 양도된 특허 역시 가치가 없는 불용 특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LG전자는 B씨에게 직무발명 보상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면서 B씨의 손을 들어줬다. LG전자는 지난 6월 전직 연구원 C씨가 특허법원에 신청한 직무발명 보상금 청구소송에서 패소한 바 있어 내부적으로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직원과 회사의 다툼을 막기 위해서는 직무발명 보상금 관련 규정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백만기 전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은 "직무발명 보상금을 임금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게 가장 큰 문제다"고 지적한다. 그는 "2016년 말 소득세법이 개정되면서 직무발명 보상금이 기타소득에서 근로소득으로 편입되면서 발명자들이 받는 실직 소득이 줄어들었다"면서 "최근 이공계 인력이 의대로 빠져나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크게는 한국 과학기술계의 경쟁력 확보, 작게는 발명 인재의 사기 진작 차원에서 직무발명 보상금 제도를 손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기업 컨설팅 전문그룹인 스티리치 어드바이져 권순만 본부장도 "직무발명은 원칙적으로 직원에게 소유권이 있다. 기업에 소유권을 승계할 경우 적절한 보상 기준을 정해야 한다"면서 "직무발명 보상금 제도는 1980년대 도입 이후 꾸준히 개선돼 왔지만 여전히 한계도 있다. 발명자의 공헌도를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운영 세칙을 마련해야 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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