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런과 피케팅 [뉴노멀-혁신]
김진화 | 연쇄창업가
‘꽃이 없다’는 이름이 무색하게 칼로 반을 자르면 꽃이 활짝 핀 듯, 탐스럽게 잘 익은 무화과가 제철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곶감처럼 건조하거나 잼 형태로 맛보는 게 고작이었는데, 저장과 운송 기술 발달로 제철에 신선한 무화과를 맛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금값이 된 과일가격 일반에 견줘보면 그리 비싸지도 않다.
그래서일까, 몇해 전만 해도 국내 대표 무화과 산지인 전남 영암 인근 목포 시내 카페 등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무화과 케이크며 타르트가 인기몰이 중이란다. 대전의 유명 빵집 성심당에서 내놓은 무화과 케이크를 사려는 사람들이 꼭두새벽부터 줄을 서고 문을 열기도 전에 이미 대기표가 동이 난다는 소식이다. 이른바 ‘오픈런’ 최신 아이템으로 등극한 셈이다.
한때 일부 명품이나 한정판 스니커즈 등에 국한됐던 ‘오픈런’ 현상이 맛집, 식품 등으로 보편화되는 양상이다. 아이돌 사생팬들의 전유물 같았던 ‘피케팅’(피를 튀기는 티케팅) 역시 트로트 같은 다른 장르는 물론이고 공연 예술 전반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클래식 공연도 예외가 아니다. 한때는 초대권이 난무했던 객석이 치열한 티케팅 전장이 되고 있다.
스포츠 레저 분야 역시 녹록지 않다. 골프장, 테니스코트 부킹은 물론이고 전국구가 아닌 지방자치단체 수준의 마라톤대회 참가 신청도 순식간에 마감되기 일쑤다. 아무튼 무언가 즐기고 맛보려면 치열한 경쟁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마트폰부터 잽싸게 놀려야 하는 게 기본이 됐다. 피곤한 세상이다.
과거에도 오픈런이 없지는 않았다. 대학교 수강신청 기간이 되면 부지런한 친구들은 이른 새벽부터 전산실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 명절 귀성 열차표를 구하기 위해 전날 밤부터 서울역 광장을 길게 휘감았던 인파 역시도 그리 오래된 기억은 아니다.이런 추억의 오픈런은 대부분 인터넷 등 기술의 발달과 근본적 수요 대처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그렇게 사라진 비자발적 오픈런의 자리를 다분히 자발적이고 사서 고생 격인 오픈런이 대체했다는 사실이 다소 놀랍기는 하다. 한국만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오픈런의 원조는 블랙프라이데이에 그야말로 돌진하는 오프닝 러시 인파였다. 식당이나 제과점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역시 일본이 원조 격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그것처럼 현상까지는 아니었고, 이마저도 이커머스나 스마트폰 앱 덕분에 예전 같지만은 않다.
뭐든 오픈런이 벌어지는 작금의 현상은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쉽게는 치열한 경쟁이 ‘국룰’이 된 한국 사회가 고스란히 투영됐다는 지적 같은 것들이다. 남들 하는 건 다 해봐야 한다는 특유의 쏠림 현상이 원인이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소셜미디어 역시 빠질 수 없다. 소문이 급속도로 전파되는 것은 물론이고 과시욕을 자극해 경쟁을 부추긴다는 거다. 모두 일리 있는 얘기다.
다만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일만은 아니기도 하다. 극성스러움은 우려되지만 한국 사회의 역동성과 활력을 보여주는 단면으로 볼 여지도 있다. 취향을 드러내고 누리는 데 적극적이고, 공동체의 관심사에 동참하려 애쓰며, 남들보다 앞서가려는 의지. 우리가 시장경제라 부르는 시스템에 어느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게 없는 특질 내지는 태도다.
어쩌면 조금은 유별나 보이는 이 오픈런과 피케팅 현상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의 힌트가 될 법도 하다.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경쟁에서 잠시 이기는 것으로 소진해버리는 에너지를 어떻게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삶의 에너지로 만들 것인가. 일부에만 국한되고 쏠리는 관심 영역의 지체와 병목 현상을 어떻게 더 많은 분야와 대상으로 다양화하며 길을 내고 판을 키워갈 것인가.
“좋은 옛것이 아닌 나쁜 새로운 것에서 시작하라”는 브레히트의 조언을 되새겨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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