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적금 대신 ELS 가입, 증명이 안 돼" 배상 수용 '울며 겨자 먹기'
자율배상 동의율 최소 75% 넘겨
"은행-투자자 간 정보 격차 고려해
은행이 투자자 과실 입증하거나
현행 조정제도 전문성 강화해야"
2021년 4월 홍콩항셍중국기업지수(H지수) 관련 주가연계증권(ELS)에 가입했던 전업주부 A(56)씨는 4월 결국 가입금액의 45%인 1,600여만 원의 손실을 떠안았다. A씨는 예·적금 가입을 위해 은행에 들렀다가 창구직원의 강력한 권유로 ELS에 가입했다. 그래서 3월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자율배상 권고안을 동아줄 삼았다. 설명의무 위반, 부당권유, 예·적금 가입 목적 등에서 가점을 받아 배상비율 50%는 인정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20219490000600)
하지만 은행이 알려온 배상비율은 35%였다. 부당권유와 예·적금 가입 목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예·적금 가입 목적은 "ELS 가입 즈음 예·적금 만기 또는 해지 내역이 있다면 인정받았겠지만 개인적으로 보관하던 목돈을 붓는 것은 인정받지 못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는 심지어 '2019년 ELS 가입 이력이 있다'는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펀드 같은 걸 가입해 준다며 은행원이 내 폰을 직접 조작한 사실이 떠올랐다. 그게 ELS였던 것 같다"며 가슴을 쳤다.
그는 은행을 찾아 가입 당시 상황을 상세히 서술한 자료를 제출하며 이의신청을 했다. 2주 걸린다던 은행 검토는 이틀 만에 끝났다. 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변했지만 은행 직원은 "고객님 주장일 뿐"이라는 취지의 말만 되풀이했다.
홍콩 H지수 ELS 배상절차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25일 KB국민·신한·하나·NH농협은행 설명을 종합하면, 22일까지 자율배상 대상자 중 최소 75%가 은행 자율배상안에 동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의율이 97%에 이르는 곳도 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느니' 합의안을 받아들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응수한다. 은행 직원 권유로 예·적금 대신 ELS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증빙할 수 없을뿐더러, 은행이 제시하는 수십 장의 동의서에 사인하는 바람에 소송까지 가도 승소 가능성이 낮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22일까지 네 은행의 평균 배상비율이 25~38%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은행-투자자 간 정보 격차가 크다는 점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A씨와 다른 은행에서 홍콩 ELS에 두 차례 가입한 유연옥(66)씨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느꼈다고 했다. 특히 은행이 책정한 배상비율이 적정한지 검토할 수 있는 잣대가 없어 "은행만 유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은행이 배상비율표 항목마다 각각 어떤 세부기준을 마련했는지, 어떤 특징을 지닌 고객이 어떤 항목에서 배상비율 가점을 받았는지 자료를 제공했다면" 하고 아쉬움을 표했다.
"배상비율이 '운'에 달렸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유씨는 배상비율로 30%와 45%를 받았는데, ELS 가입 직전 해지한 예·적금 잔액이 배상비율을 갈랐다. 'ELS 가입 전 해지한 예·적금 잔액이 ELS 투자액의 50%를 넘으면 예·적금 가입 목적을 인정해 준다'는 해당 은행 기준에 한 상품이 부합했기 때문이다. 예·적금 가입 목적을 인정받을 경우 배상비율 10%가 가산된다.
'은행에만 유리한' 배상절차에 불복해 투자자 533명은 소송을 준비 중이다. 홍콩 ELS 손실 투자자로 구성된 금융사기예방연대는 최근 법무법인 YK를 법률대리인으로 선임했다. 길성주 금융사기예방연대 집행위원장은 "경찰은 폭행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 피해자 진술서를 취합해 검찰에 송치한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대표성을 띠는 투자자 집단이 있는 걸 알면서도 의견수렴이나 소통이 일절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금융조정제도 개선으로 소비자 권익 강화해야"
전문가들은 은행이 준용하고 있는 금감원 배상비율안은 △ELS가 20년 넘게 판매된 상품이라는 점 △유사 사건인 파생결합펀드(DLF) 대비 구조가 단순하다는 점 △배상비율안조차 없다면 투자자가 배상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 등을 감안해 고심 끝에 내놓은 결론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고위험 금융상품 불완전판매 사건이 잇따르는 점을 고려해 금융조정제도의 개선은 분명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금융분쟁 사건을 다수 경험한 김형주 변호사(법무법인 평안)는 "판매자의 불완전판매가 인정된다면 그 불완전판매를 이유로 기본배상비율을 높게 잡고, 투자자별로 배상비율을 낮출 수 있는 사유를 판매자가 입증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 기본배상비율을 줄이는 것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감안한 투자자 보호에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불완전판매한 사실, 이로 인해 손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피해자가 입증했다면 입증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는 현행 손해배상법제를 그 근거로 들었다.
지난달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1은 '해외 금융분쟁 해결제도의 특징 및 국내 시사점' 보고서를 내고 국내 금융분쟁 조정제도의 발전을 위해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의 독립성·전문성 제고 및 이를 위한 분조위 인력·예산 확대" 등을 주장했다. 그는 본보와 통화에서 "구제 비율(배상비율)도 낮고 민사 소송으로 넘어가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더 낮은 구제 비율을 받을 수 있다"며 보고서 취지를 설명했다. 그는 "분조위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한편, 결정에 구속력을 부여하면 분쟁 절차가 현재보다 단순화할 수 있다"2고 했다.
윤주영 기자 roza@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전복, 뿔소라 가격 반토막"… '日 오염수 방류 1년' 어민들 한숨 [르포] | 한국일보
- 신유빈 먼저 잡은 빙그레…회사로 온 뜻밖의 전화, 섭외 행운 안겼다 | 한국일보
- "방탄소년단 이름에 누 끼쳐...깊이 후회하며 하루하루 반성"... 슈가 재차 사과 | 한국일보
- “5분 뒤면 숨 못 쉴 거 같다”던 딸, 눈물의 발인식 | 한국일보
- "8만원짜리 공연을 8만달러로 착각?"... 카녜이 웨스트, 내한공연서 50곡 쏟아냈다 | 한국일보
- 전문의 없어 구로역 사고 환자 16시간 만에 수술...커지는 응급실 공백 | 한국일보
- 해리스 “김정은 비위 안 맞추겠다” vs 트럼프 “김정은과 다시 잘 지낼 것” | 한국일보
- 이제 '견딜 만한 여름'은 없다... "2030년대부턴 '매년 폭염'" | 한국일보
- "엿 바꿔 먹자" "몇 천 당기자" 쯔양 협박해 한탕 노린 그들 | 한국일보
- 이별 통보에 8년 사귄 연인 폭행한 승려 벌금형 | 한국일보